인왕산에 얽힌 이야기와 옛날 여관의 절묘한 어우러짐

입력 2019-08-18 15:35 수정 2019-08-18 21:08
“할아버지 진경이란 무엇입니까.” “왼쪽 그림을 보니 소나무를 굽게 그렸구나. 나 이전에는 소나무를 곧게 그렸다. 중국 화보를 보고 그렸으니까.”

방사형 꽃무늬 벽지 아주 작은 방에 조선시대 화첩 형식의 그림이 걸렸다. 정원연 작가가 자신을 조선 후기 화가 겸재 정선의 후손으로 상정하고 정선에게 묻고 답하는 내용을 소나무 그림과 함께 그려놓은 것이다.
정원연 작가의 '광산 정씨 조손 대담', 종이에 수채, 2019년 작.

인왕산을 지척에 둔 서울 종로구의 복합문화공간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진행 중인 전시 ‘인왕산프로젝트 유서산기(遊西山記)’는 인왕산을 창작으로 매개로 삼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전시장이 속한 장소성을 전시로 풀어냈기 때문이다. 독립 큐레이터 최윤정씨는 고사리, 전리해 등 참여 작가 10여명과 인왕산에 대해 공동 연구를 한 뒤 그 결과물을 각자의 방식으로 전시하게 했다. 전시명 유서산기는 척화파 김상헌이 쓴 인왕산 유람기에서 땄다.
정원연 작가는 ‘인왕제색도’로 유명한 정선이 개척한 진경산수를 통해 전통의 재해석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김도희 작가의 '인왕여름산수기-인곡산수', 가변설치, 혼합매체, 2019년 작.

인왕산 자락 서촌에는 조선시대 중인들이 살았다. 양반이 될 수 없었던 중인들의 신세한탄을 담은 시조들이 홍순명 작가가 선비의 뒷모습만 그린 ‘주변인’ 시리즈와 병치돼 묘한 아픔을 느끼게 한다. 김도희 작가는 인왕산을 오르며 입었던 자신의 등산바지에 그곳 흙을 채워 걸어놓은 설치 작업을 했다. 인왕산 자락 정선의 집 ‘인곡유거(仁谷幽居)’를 빗대 ‘인곡산수(人谷山水)’라고 명명했다. 2층 구석 흉가 같은 방에서는 판소리 ‘호랑가’가 흘러나온다. 전리해 작가가 인왕산에 출몰했던 호랑이에 관한 설화를 연구한 뒤 호랑이의 죽음과 고통이 갖는 현재적 의미를 전통 노래 형식에 담은 것이다. 2층 문 양쪽에는 오석근 작가가 찍은 소나무 사진이 벽화처럼 버티고 섰다.

일제강점기 1930년대 지어진 보안여관은 문인들의 교류의 장소이기도 했다. 옛 여관 그대로 살려서 지금은 전시장으로 쓴다. 작품이 전시 공간 속에 잘 스며드는 전시다. 삐거덕 거리는 계단, 옛날의 꽃무늬 벽지 등이 그대로 있어 시간 여행을 하는 기분도 준다. 25일까지. 글·사진=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