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보다 친일파가 더 문제” 신채호 선생 며느리가 주옥순에게

입력 2019-08-15 17:57

독립운동가 단재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인 이덕남(76) 여사가 “1945년 8월 15일 이후 친일파가 제대로 청산되지 못했다. (일본보다) 우리나라 친일파가 더 문제”라고 말했다.

단재의 둘재 아들 신수범(1991년 작고) 선생의 부인인 이 여사는 광복절인 15일 연합뉴스에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주옥순 엄마부대봉사단 대표를 언급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 전 교수는 ‘반일 종족주의’ 저자다. 주 대표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사죄한다”고 말했다.

단재는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뤼순 감옥에서 숨졌다. 이 여사는 “(시아버지는) 독립에 목숨을 바칠 정도로 고집이 세셨다”면서도 “남편은 ‘남들은 아버지를 냉정하다고 알고 있지만 따뜻하고 자애로운 분이었다’고 기억했다”고 전했다. 이 여사에 따르면 그의 남편은 8살 때쯤 한 달간 중국으로 건너가 단재와 함께 살았다. 단재는 한 달 내내 아들에게 자신의 무릎을 내어줬다. 남편은 생전 “그 기억이 또렷하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여사는 국가가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제대로된 대우를 해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충원에 가보면 17만명이나 되는 무후(無後·자손이 없음) 유공자들이 있다”며 “실제로 자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호적·국적이 없기 때문에 자손과 연결고리가 없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단재도 무국적이었다가 2009년에서야 국적을 회복했다. 1912년 일본은 식민통치를 위해 호적제를 개편했다. 일본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하던 독립운동가들은 광복 후에도 국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정부가 호적에 등재된 사람에게만 국적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여사는 단재의 국적을 회복하기 위해 19년을 싸웠다. 그는 “바로 선 나라였으면 해방된 후 순국선열의 국적을 바로 회복해줘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독립운동가 후손에게 가난은 숙명이었다. 단재의 부인이자 이 여사의 시어머니인 박자혜 선생은 산파 일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간호사였던 그는 간호사들의 독립운동 단체인 간우회(看友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 여사는 현재 단재의 옛 삼청동 집터 소유권을 돌려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단재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까지 거주했던 곳으로 추정된다. 망명 후 1912년 국유지로 기록됐다가 단재가 순국한 지 2년이 흐른 1939년 한 일본인 앞으로 소유권 보존 등기가 이뤄졌다. 현재는 선학원이 소유하고 있다. 이 여사는 “국가가 이완용 등 친일파 땅은 찾아주면서 독립을 위해 하나뿐인 목숨을 바친 분들의 땅 한 평은 찾아줘 봤느냐”며 “이번에 내가 투쟁의 선봉에 섰다”고 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