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열 살 때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억울하게 죽는 걸 목격한 정조는 마침내 왕 위에 오른 뒤 이렇게 선언했다. 동대문 밖에 묻힌 아버지의 무덤을 수원 팔달산으로 옮긴 뒤 성을 쌓기 위해 학자들과 머리를 맞댔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총애했던 신하 정약용이 16세기에 중국에 전래된 서양기술에 관한 최초의 책인 ‘기기도설(奇器圖說)’을 참고해 제작한 거중기로 쌓은 성이다. 수원 화성은 전투하기 위해 세워진 성과 달리 백성들이 사는 공간을 안고 있다는 점도 남다르다. 그런 의의를 인정받아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 수원화성을 주제로 기획전을 열고 있다. 11월 3일까지 이어지는 ‘셩: 판타스틱 시티’는 18세기 조선 사회의 상업적 번영과 사회 변화, 기술의 발달을 보여주는 건축물인 수원화성과 이를 지휘한 정조의 혁신성을 동시대 작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마련된 전시이다.
전시 제목인 ‘셩’은 방어시설은 ‘성(城)’을 의미하는 동시에 정조를 뜻한다. 드라마 덕분에 이산이라는 이름이 잘 알려진 정조는 나중에 이름을 ‘셩’으로 개명했다.
초대된 작가는 민정기(70) 서용선(68) 등 원로부터 나현(49), 최선(46) 김도희(40), 김경태(36) 등 30·40대 작가, 타이포그라퍼인 안상수(67),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50) 등 여러 장르, 다양한 연령대의 10인이 선정됐다.
서용선은 회화와 설치를 병치시켜 정조의 실존적 자아를 체감하게 한다. 캔버스 속에 아버지의 죽음을 상징하는 뒤주, 화성을 쌓을 때 사용한 거중기, 곤룡포의 정조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 등의 이미지가 혼재돼 있는데 특유의 원색과 직관적인 필치가 긴장감을 준다. 전시장 바닥에 주춧돌을 깔아 실제 궁궐에 들어온 기분이 들며 정조의 삶에 빠져들게 한다. 민정기는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기념하는 진찬(잔치) 그림인 ‘봉수당 진찬도’의 이미지와 아파트가 들어선 수원 도심의 현재 모습을 중첩했다.
나현은 개망초, 클로버 등 귀화식물을 활용한 기존의 작업을 조선 시대 유입된 서양기술에 관한 책인 ‘기기도설(奇器圖說)을 결합해 ‘귀화식물 도설’을 만들었다. 서양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정조의 혁신성에 대한 헌사다. 지역작가인 박근용(61)은 수원에서 버려진 간판을 재료로 사용한 네온 글씨 작업 ‘이젠, 더 이상 진실을 덮지 마시오’를 내놨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 나오는 글귀 ‘진실은 거짓의 반대편에 있다’를 연상시키는 문장이다.
김경태의 사진이 갖는 압도적인 선명함은 관람객들이 사물의 부분 부분에 주목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번에는 수원 화성의 망루인 ‘서북공심돈’으로 관객의 시선을 유도한다. 안상수는 이성, 수원, 화성에서 추출한 자음인 ‘ㅇ’ ‘ㅅ’ ‘ㅎ’을 수원 화성의 이미지와 조합한다.
10명이나 되는 작가가 초청됐지만, 개인전처럼 충분히 전시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몰입도를 높였다.
김찬동 관장은 “정조의 혁신성과 그것의 실체인 수원 화성이 어떻게 현재 받아들여 지고 미래에 대한 기대를 낳는지 살펴보는 자리”라며 “작가들을 초청해 수원 화성에 관해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전시와 연계해 수원 화성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이 병행된다면 관람객 역시 이번 전시에 대한 이해도와 만족감이 높아질 것 같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