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민간 연구원에서 신입사원으로 일하던 A씨는 지난달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소식을 듣고 기뻤다. 연구원 대표가 그동안 직원들에게 저질러온 사내 괴롭힘에 제동이 걸릴 수 있겠다고 기대했다. 대표는 걸핏하면 직원들에게 “월급이 아깝다”며 소리를 지르고 욕을 했다. 퇴근 뒤 뿐 아니라 주말과 공휴일에도 메신저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다른 직원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했다. 화장실 입구를 비롯한 사무실 10여곳에 CCTV를 설치해 직원을 감시했다. 직원들은 대표의 성화에 에어컨조차 마음대로 켤 수 없었다.
그러나 법이 시행된 뒤에도 A씨의 일상은 바뀌지 않았다. 대표는 직간접적으로 문제제기를 해온 A씨를 더욱 노골적으로 괴롭혔다. 3개월 수습기간이 지나고 정규직으로 발령나던 날 A씨는 자신이 근로계약서와 달리 섭외파트에 배치된 걸 알게 됐다. 그의 자리는 파티션이 없는 사무실 입구였다. 책상 위 컴퓨터에는 한글이나 엑셀 등 업무용 프로그램이 설치돼 있지 않았다.
대표는 다른 직원을 통해 A씨에게 권고사직을 요구했다. 견디다 못한 A씨는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에 ‘갑질’을 신고했다. 다음 날 대표는 ‘직장 내 분위기 훼손’이라는 명목으로 A씨를 해고했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16일로 시행 한달째를 맞는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바뀐 게 거의 없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전문가들은 법이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정부가 앉아서 신고를 기다릴 것만 아니라 적극적인 시행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직장갑질119는 지난달 16일부터 지난 14일까지 접수된 갑질 관련 제보를 분석한 결과를 15일 발표했다. 총 제보 건수는 1844건으로 하루 평균 102.5건을 기록했다. 법 시행 이전인 하루 평균 65건에 비해 57% 늘었다.
1844건 중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하는 제보는 1073건이다. 이 가운데 부당지시와 따돌림·차별이 각각 231건, 217건으로 가장 많았다. 폭행·폭언과 모욕·명예훼손이 189건, 137건으로 뒤를 이었다. 강요도 75건을 차지했다.
특히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믿고 회사 인사 담당부서에 괴롭힘 사실을 신고했으나 소용이 없거나 오히려 더 곤란한 상황에 몰렸다는 제보가 이어졌다. 인사부서 신고 뒤 팀장이나 부서장에게서 “너 때문에 나와 인사팀이 얼마나 안 좋은 상황에 처했는 줄 아느냐” “큰 실수한 줄 알라”는 타박을 들었다는 것이다. 회사 측에서 가해자가 사실을 인정하거나 반성하기 전에 피해자와 대면시켜 상황을 악화시킨 사례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바뀐 법을 근거로 기업이 사내 취업규칙을 개정하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점규 직장갑질119 운영위원은 “제보된 사례에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 따라 취업규칙을 개정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중소기업이 이런 실정”이라고 말했다.
법에 따르면 고용주는 직장 내 괴롭힘의 예방 및 발생 시 조치에 관한 사항 등을 정해 취업규칙에 필수적으로 기재하고 작성·변경한 취업규칙을 신고해야 한다. 이를 위반하면 500만원 이하의 과태료를 내야한다. 박 위원은 “제보 사례는 직장 내 괴롭힘 법과 함께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사례가 다수”라면서 “정부가 대대적인 근로감독으로 일벌백계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