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 성범죄 혐의로 수감된 미국의 억만장자 제프리 엡스타인(66)이 10일(현지시간) 교도소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자살로 그가 저지른 희대의 아동 성범죄의 진실 규명이 난관에 부딪히면서 피해 여성들의 분노 어린 절규가 이어지고 있다. 교도소 측이 자살 징후를 보였던 엡스타인에 대한 ‘특별 감시’를 해제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가 법의 심판을 받을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뉴욕타임스 등 현지언론은 엡스타인이 이날 오전 뉴욕 맨해튼 메트로폴리탄교도소의 독방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교도소 관계자들이 의식이 없는 그를 인근 맨해튼 종합병원으로 이송했지만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엡스타인은 지난달 26일 보석이 기각된 후에도 자살 시도를 해 인근 병원으로 이송된 바 있다. 당시 그의 목 주변에는 멍 같은 타박상이 발견됐다.
헤지펀드 매니저 출신의 거부(巨富)인 엡스타인은 지난 2002~2005년 뉴욕과 플로리다 등지에서 20여명의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매매를 하는 등 수십명을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지난달 6일 체포돼 기소됐다.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면 최고 45년의 징역형이 예상됐던 상황이었다. 특히 엡스타인은 지난 2008년에도 미성년자 성범죄 혐의로 종신형 위기에 처했으나 검사와의 플리바게닝(감형협상)으로 불기소 처분을 받은 바 있다. 사회 유력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운 그가 특권층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의혹도 끊임없이 제기됐다. 당시 수사팀 지휘 책임을 갖는 플로리다 남부지검장으로서 감형협상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은 알렉산더 어코스타 노동장관은 ‘봐주기 수사’ 논란이 거세지자 지난달 12일 결국 사임했다.
이번에야말로 ‘유예됐던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다는 기대감이 조성됐으나 엡스타인이 돌연 자살하면서 진실 규명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린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네브래스카 출신 벤 사스 공화당 상원의원은 이날 윌리엄 바 법무장관에게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항의 서한을 보냈다. 그는 “법무부와 교도소의 모든 사람들 모두가 엡스타인의 자살 징후를 숙지하고 있었는데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며 “그의 어두운 비밀이 죽음으로 묻혀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바 장관도 교도소에서 엡스타인의 자살을 막기 위한 특별 감시가 해제됐다는 얘기를 듣고 경악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성명을 통해 “미 연방수사국(FBI)와 법무부 검사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사할 것”이라고 밝혔다.
피해 여성들은 허탈함과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도 친분이 두터울 만큼 거물 인사인 엡스타인을 힘겨운 투쟁 끝에 법정 앞에 세웠지만 더는 죗값을 묻지 못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미성년자 시절 엡스타인에게 지속적인 성적 착취를 당했다고 폭로한 버지니아 주프레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다시는 그가 누군가에게 해악을 끼치지 못한 것이란 사실이 기쁘다”면서도 “여기까지 오기 위해 정말 노력했는데 그는 그 노력마저 빼앗아버렸다”고 말했다. 또 다른 피해자 미셸 리카타는 “내가 바란 건 그의 죽음이 아니라 그가 죄값을 치르는 모습이었다”며 허탈해했다.
워싱턴포스트는 피해 여성들의 변호인인 리사 블룸의 말을 인용해 “엡스타인의 모든 재산을 동결하라는 내용의 민사소송을 진행할 것”이라며 “엡스타인 탓에 삶이 무너진 피해자들은 완전하고 공정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전했다.
진실 규명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음모론을 퍼나르며 사태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그는 클린턴 전 대통령이 엡스타인 죽음의 배후라는 것을 시사하는 내용의 트윗을 공유하며 근거없는 타살설에 힘을 실어줬다. 트럼프 대통령이 과거 엡스타인을 “멋진 녀석”으로 표현하는 등 깊은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 상황에서 자신에게까지 불길이 번질 것을 우려해 물타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