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촌동 폐가에서 저녁마다 무슨 일이?

입력 2019-08-08 16:07 수정 2019-08-08 19:50
서울 은평구 역촌동 OO번지. 6호선 응암역에서 내려 10여분 걸어 찾은 그곳은 겉보기에도 폐가의 느낌이 풀풀 났다. 칠 벗겨진 담 너머로 감나무와 대추나무가 보여 ‘응팔’(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기억을 소환하는 그런 집이었다. 대문을 열어 마당을 가로지르니 낮은 계단 위 현관이 나타나고, 거실 마루 한쪽 벽에는 벽감 장식장이 있는 1970년대의 ‘불란서 식 양옥’이었다. 자식들을 출가시키고 홀로 살던 할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면서 1년 넘게 버려졌던 이 집이 한 달 전 부터 사람들로 웅성거린다.
연기백 작가가 서울 은평구 역촌동의 한 폐가를 이용해 진행하고 있는 '온 고잉 프로젝트: 역촌 40'의 안방 모습. 퍼포먼스를 위해 치운 주방기기를 설치작품처럼 쌓아놓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초청장을 보내온 이는 서울대 조소과 출신의 연기백(45) 작가였다. 이 집을 빌려 1년 반 동안 ‘온 고잉 프로젝트: 역촌 40’을 진행한다. 한달 간 하는 첫 프로젝트 ‘일시적 식탁’(15일까지)의 일환으로 직접 요리를 했으니 식사하러 오라고 했다.

연 작가는 미술가이면서 총감독을 맡았고, 은평구 주민인 소설가 김태용(45)씨,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설치 미술가이자 번역가 라삐율(48)씨와 협업을 하고 있다.
좌로부터 연기백, 라삐율, 김태용 작가.

거실 마루는 걸으면 삐거덕 소리가 났고, 가시지 않은 먼지 탓에 코가 매웠다. 때 탄 선풍기와 괘종시계, 안방의 자개농 등이 과거의 시간을 보존하고 있었다. ‘퉤’ ‘퉤’라고 쓴 종이가 개념미술작품처럼 벽에 붙어 있고, 지하실에는 떼어낸 창문을 설치작품처럼 쌓아놓았다. 다락방엔 집 청소 과정을 담은 영상이 흘렀다. 연 작가의 직업은 이 집에 쌓인 시간을 한 겹 한 겹 벗겨내 집의 역사를 읽는 일 같았다.
연기백 작가가 직접 차린 밥상. '일시적 식탁' 프로젝트에서는 연 작가나 김태용 소설가가 초청한 손님들이 이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는다.

연 작가는 서울 가리봉동, 교남동 등 철거지역의 낡은 집을 찾아 뜯어낸 벽지를 이용하는 설치 작업 ‘도배 프로젝트’로 유명하다. 이사 오는 주인들이 매번 덧바른 도배지를 물에 불리면 낱장처럼 뜯어지는데, 그걸 커튼처럼 전시장에 걸어놓았다. 그는 그걸 시간의 겹을 벗기는 작업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그 대상이 도배지에서 집 전체로 확대된 것이다.

왜 밥을 먹는 퍼포먼스를 하는 것일까. 그는 “이 집에서 처음 밥을 먹을 때, 마치 집에 쌓인 시간을 음미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느낌을 공유하고 싶었다”고 했다.
지하실의 창을 떼어낸 뒤 설치 작품처럼 쌓아놓았다.

서울예술대 교수인 김 작가는 이 집에서 발견한 낙서, 신문 조각, 스티커 등의 문자를 ‘단서’ 삼아 가상 에세이를 쓴다. 그는 단편집 ‘풀밭위의 돼지’ 장편소설 ‘숨김없이, 남김없이’ 등을 통해 전통적 소설 문법을 해체시키는 글쓰기 작업을 해 왔다.

마침 기자가 찾아간 날은 ‘일시적 식탁’ 대신에 퍼포먼스가 있는 날이었다. 라삐율 작가는 주방 공간을 이용해 김 작가의 장편소설에 나오는 ‘뭐’ ‘너’ ‘주둥이’ 등의 단어를 가지고 벽면에 슬라이드를 쏘는 작업을 했다. ‘뭐뭐뭐뭐뭐뭐. 무뭐. 무무뭄.’ 갑자기 거실에서 김 작가가 ‘숨김없이, 남김없이’를 낭독하는 소리가 집안에 메아리쳤다. ‘너’라고 불리는 할머니와 뭐, 뭐 라고 짖는 ‘주둥이’라는 이름의 개가 등장하는 소설이다.

이들의 예술실험은 몇 가지 점에서 눈에 띈다. 우선 미술관이 아닌 폐가를 전시공간으로 설정함으로써 일상과 생생하게 결합하는 미술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그 집 자체가 시간의 결을 품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 아무리 탁월한 그림이나 조각도 흉내 낼 수 없다.

두 번째는 초대받은 하루 4명의 관객만이 ‘일시적 식탁’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관객이자 그야말로 손님이다. 관람객 수가 미술 작업의 성공 척도인 시대에 그는 속도와 상업주의에 저항하는 ‘느린 미술’을 추구하는 셈이다. 연 작가는 “한 명 한 명 초대장을 보내 생활과 구분되지 않는 미술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세 번째는 ‘과정의 미술’이라는 점이다. 전시 제목처럼 결과를 향해 모색해가는 작업이다. 추후 건축가, 소설가, 도배사, 다큐멘터리 감독 등 6∼7명이 추가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모든 작업은 내년 5월쯤 마무리돼 완결판으로 전시되고, 책으로도 출판된다.

네 번째는 미술과 문학, 무용 등 칸막이 쳐졌던 장르들이 한 공간에서 만나 융합한다는 것이다.
김 작가는 “제 소설은 텍스트 자체가 ‘ㅅㅅㅅㅅㅅ’ 식으로 자음을 나열해 새의 형태를 만드는 등 이미지적 요소가 있다”며 “미술가들과 협업하니 언어적 상상력이 새로 생겨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글·사진=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