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가 8일 친일 단죄문(斷罪文) 제막식을 가졌다. 단죄문은 일제 강점기 식민통치를 찬양하고 사리사욕을 채운 인사들의 행적을 후대에 전하기 위한 것이다.
그동안 경남 거제군과 강원 정선군 등 기초단체가 친일인사 단죄비를 건립한 적은 있으나 광역단체로는 광주가 처음이다.
광주시는 “암울한 일제강점기 친일활동으로 민족정기를 말살하는 데 앞장 선 인사들을 꾸짖는 단죄문을 광주공원에 설치했다”고 밝혔다. 시는 이를 위해 2018년 7월부터 올해 1월까지 광주 도심 곳곳에서 친일잔재 전수조사를 실시했다. 전문기관에 용역도 맡겼다.
그 결과 친일인사들의 부끄러운 행적을 미화한 선정비(善政碑) 등 비석과 누정현판, 군사시설 등 다양한 일제 잔재물을 확인했다. 시와 역대 광주시민대상 수상자 82명으로 구성된 시정자문위원회는 지난달 이 중 65곳의 일제 잔재물에 단죄문 또는 단죄비를 세우기로 결정하고 제막식을 가진 것이다.
대표적 친일잔재는 윤웅렬, 이근호, 홍난유 선정비 등 광주지역 1호 공원인 광주공원의 사적비 5개다. 화순 너릿재 공원 서정주의 ‘무등을 보며’ 시비와 사직공원 인근 양파정에 걸린 정봉현·여규형·남기윤·정윤수 현판, 세하동 습향각에 설치된 신철균·남계룡 현판도 친일인사 잔재물로 조사됐다. 친일 작곡가 현제명, 김동진, 김성태, 이흥렬이 작곡한 교가 18개는 광주지역 대학과 중·고교에서 여전히 불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군사시설로 활용된 지하동굴, 신사참배를 위한 광주공원 계단, 송정공원 옆 송정신사의 참계, 신목, 석등룡기단 등도 그대로 남아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수록된 윤웅렬(1840~1911)과 이근호(1861~1923)의 경우 한말 전남 관찰사 재직시절 선정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선정비가 세워졌다. 두 사람의 선정비는 1593년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에서 왜군을 물리친 권율(1537~1599)장군의 공적비(창의비)를 포위하듯 에워싸고 있다.
시는 이날 단죄문 제막식을 가진 광주공원 계단에 ‘일제 식민통치 잔재물인 광주신사 계단입니다’라는 문구를 써서 붙였다. 6·25 한국전쟁 전몰장병 등 1만5867명의 위패를 모신 현충탑으로 연결되는 이 계단은 일제강점기 때는 일왕(日王)에게 고개를 숙인 채 신사참배를 하기 위해 오르던 곳이다. 친일인사들을 ‘일제 국권침탈 협력자’로 적시한 단죄문은 친일 인사의 행적을 검증된 기록으로 적시하고 있다.
시는 국·공유지에 들어선 25개 일제 잔재물에 대한 단죄문을 우선 설치한 데 이어 사유지 잔재물 40개는 토지 소유자와 협의해 추가로 단죄문이나 단죄비를 설치한다는 방침이다. 일제 징용피해자 양금덕 할머니와 시민, 학생 등 200여명이 참석한 단죄문 제막식은 경과보고, 기념사, 단죄문 낭독, 단죄문 제막, 단죄문 설치 현장 순례 순으로 진행됐다. 제막식 국민의례는 평소의 애국가 대신 일제 강점기 독립군이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 랭 사인’에 가사를 붙였던 옛 버전의 ‘애국가’를 불렀다.
광주시 윤목현 민주인권평화국장은 “3·1운동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설치한 단죄문은 식민통치의 역사를 올바로 되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