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나로그인] 중국 역사상 최고의 부패 관리 화신(和珅)

입력 2019-08-06 00:06
글=허혜윤(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마오쩌둥이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였을 때 가장 큰 근심은 자신이 건국한 새로운 국가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과거 국가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어떻게 하면 과거 왕조가 걸었던 쇠망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왕조의 쇠망은 부정부패로부터 출발하고, 부정부패와 왕조의 흥성은 동전의 양면과 같았기 때문에 마오쩌둥이 가장 경계했던 것은 당 관료들의 부패였다.

아니나 다를까 개혁 이후 중국의 경제적 부흥과 더불어 부패도 다시 만연하기 시작했고 반부패 투쟁도 강화되었다. 2012년 시진핑 집권 이후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반부패 투쟁이 진행되었다. 어느 장군 집에서는 한 병에 2000위안(우리 돈으로는 40만원 정도)이 넘는 마오타이가 2만 병이 발견되었느니, 현금 1톤이 발견되었느니 하는 뉴스는 새로운 소식도 아니게 되었다. 역사적인 부패의 회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중국의 부패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청나라 건륭제가 총애하던 신하 화신의 부패사건이다. 화신은 자신을 총애하던 태상황 건륭제가 사망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가경제에게 사약을 받는다. 건륭제의 총신이었지만 아들 가경제에게는 제거하지 않을 수 없는 원수였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막을 알기는 어려우나 화신의 재산을 몰수하기 위해 조사하니 백은 8억 량이었다는 것을 통하여 그 연유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청조의 연간 재정수입은 백은 7천만 량이었다. 그것은 화신의 재산이 10년치 이상의 국가 재정수입 총액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가난한 만주 팔기 출신으로 자금성에 들어가 건륭제의 눈에 들어, 호부시랑, 호부상서, 대학사, 군기대신 등 고위 관직을 거치고 49세에 죽은 화신이 축적한 재산이 그 만큼이었으니 해도 너무했던 것은 분명하다.

건륭제가 죽자마자 화신을 처리한 것은 가경제가 화신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1796년 건륭제가 퇴위하여 태상황에 오르고 가경제가 즉위하지만, 가경제는 여전히 실권을 가지고 있던 아버지의 눈치와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가경 4년(1799년) 정월 3일, 건륭제가 88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하자, 장례도 치르지 않은 정월 13일, 가경제는 화신의 20가지 대죄를 선포하여 화신의 재산을 몰수하라는 명을 내린다. 정월 18일, 속전속결로 화신에게는 능지처참의 형이 내려졌다. 그러나 선조의 총신이었던 점이 참작되어 능지처참 대신 사약을 내리는 걸로 바뀌고, 정월 22일, 화신은 자신의 집에서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

가경이 전광석화처럼 화신을 처리한 것은 부패에 대한 원한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가경이 재위 중 유일하게 잘한 일이 화신을 제거한 것이었다고 하니, 부패에 대한 원한이라기보다 화신에 대한 원한이나 화신의 영향력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다면 화신의 제거를 통하여 청조를 일신하여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항간에는 “화신이 거꾸러지니 가경제가 배를 채웠다(和珅跌倒, 嘉慶吃飽)”는 말이 떠돌았다고 한다. 혹자는 아버지 건륭이 아들에게 물려준 선물이 화신이었다고도 한다. 나라의 10년치 이상 세금을 한 번에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주었으니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화신의 부패는 단순히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청조의 부패가 구조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건륭 후기 이후 청조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어 결국 반식민지와 멸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시는 강건성세(康乾盛世)라 불리던, 중국 역사상 전례 없는 번영을 구가하던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청조는 황실을 필두로 지배권력층이 향락과 사치스러운 생활에 몰두하고 이와 맞물려 각급 관리들의 뇌물수수 등의 부정부패가 만연한 상황이었다.

건륭제 시기에는 황제에 대한 진공(進貢)도 그 규모와 액수가 날이 갈수록 성대해지고 관리들은 경쟁적으로 각종 공물을 황제에게 바쳤다. 또한 의죄은(議罪銀)이라는 것도 있어서 잘못을 저지른 관리들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하며 이를 반성하는 뜻에서 일정한 액수의 돈을 바치면 그들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 이렇게 거둬들인 의죄은은 대부분 국고가 아닌 황제 개인의 금고로 들어갔다. 자신이 스스로 밝힌 죄목에 비해 약소한 금액을 바칠 경우에는 도리어 황제의 진노를 사게 되니, 관리들은 경쟁적으로 자신의 죄를 부풀려 거액의 돈을 바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화신은 전성기의 중국이 어떻게 쇠락하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자 마오쩌둥이 근심한 왕조 흥망주기율의 실증이다. 시진핑의 반부패 투쟁의 뿌리에는 중국의 역사와 마오쩌둥의 근심이 있다. 시진핑의 반부패 투쟁의 성과가 화신의 사례처럼 구조화된 거대한 부패 체인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부패의 뿌리를 잘라내는 것인지는 오직 미래가 말해 줄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다행스러운 점이 있다면, 지금의 중국이 아직은 건국 100년도 되지 않은 젊은 국가라는 사실이다.

인천=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