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쌓은 스펙이라곤 일본 회사 취업용인데, 이제 와서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하나요?”
일본계 기업 취업을 목표로 최근 몇년간 일본어를 공부하고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취업준비생 A(26)씨는 한창 면접을 보러 다닐 시기에 한·일 경제전쟁이 터져 곤혹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일본 취업준비 사이트에선 ‘이런 분위기가 계속될 경우 올해 말~내년 초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 돌고 있다”며 “얼마 전까지도 정부가 해외 취업을 장려했는데, 왜 하필 지금 두 나라 관계가 이렇게 됐는지 원망스럽다”고 토로했다.
‘한·일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일본 취업 준비생들이 피해를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한동안 숨죽이며 사태를 지켜봐왔지만 최근 정부가 주최하는 일본 취업 박람회들이 잇따라 취소되거나 보류되자 크게 동요하고 있다.
실제로 고용노동부는 최근 한·일 갈등 분위기 등을 감안해 9월 열기로 했던 일본·아세안 국가 대상 취업박람회를 잠정 취소하기로 했다. 지난해 열었던 일본 기업 대상 취업박람회도 열지 않는다고 밝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해외 취업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취준생들의 우려 섞인 반응이 쏟아졌다. 한 취준생은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다보니 양국 사이가 틀어져도 취업은 다른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절망스럽다”며 “(취업 박람회가) 일본 기업 관계자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여서 많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막막하다”고 했다. 다른 취준생은 “고래 싸움에 취업 준비생 등 터지는 것 아니냐”고 호소했다.
우리 정부는 일본의 경제보복이 이뤄지기 직전까지 청년들의 일본 기업 취업을 독려해왔다. 그런만큼 취준생들의 당혹스러움은 클 수밖에 없다. 국내와 달리 일본은 일손 부족으로 기업들이 되레 ‘구인난’에 시달리고 있다. 정부의 취업박람회, 해외연수 프로그램 등을 통해 지난 3년 간 한국 청년 1만5712명이 해외에 취업했다. 이 중 일본에 취업한 청년 수가 4358명(27%)으로 가장 많다.
취준생들은 최근 급속히 확산된 반일 분위기 때문에 주변에 고민을 털어놓기도 힘들다고 했다. 일본어 학과 졸업 후 올해 상반기부터 일본 기업에 지원서를 넣기 시작한 김모(24)씨는 “얼마 전 한 모임에서 한·일 관계 때문에 취업이 걱정된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역사의식이 없는 사람 취급을 받았다”며 “불매운동도 의미가 있겠지만 생계가 달린 일은 또 다른 차원인데, 이해를 받지 못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외교 기조에 맞게 일관적으로 청년 정책을 펼치는 건 필요하다”면서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보완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정부가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 대응으로 여러 품목 수출 규제를 검토 중인데, 이런 맥락에서 노동력도 소극적으로라도 제한하는 걸 살피는 모양새”라며 “다만 취업 문제는 개인이 입는 피해가 훨씬 더 직접적이고 크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취업박람회 취소 전 취준생 의견을 수렴하거나 여론 조사를 실시해 예상되는 피해사항을 파악하고 보완책을 마련했어야했다”고 지적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해외 취업 지원 프로그램은 정부와 취준생 간의 신뢰가 중요한데 이렇게 일방적으로 어그러지면 청년들이 정부를 믿기 힘들어진다”며 “부당한 경제 보복에 대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취준생들의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규영 기자 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