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화이트리스트(안보상 수출 심사 우대국가)’ 한국 제외조치를 놓고 한·일 외교수장이 태국 방콕에서 설전을 벌였다. 애초부터 화이트리스트에 없었던 싱가포르는 오히려 화이트리스트를 확대해야 한다며 일본을 비판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2일(현지시간) 오전 태국 방콕 센테라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외교장관회의’에서 일본의 추가 수출규제 조치를 강력 비판했다. 다자회의에서 특정국가를 지목, 비판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강 장관은 모두발언에서 작심한 듯 “오늘 아침 일본이 우리나라를 포괄적 수출 우대조치를 받는 무역상대국 목록에서 독단적·임의적으로 제외한 결정에 대해 관심을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며 “이런 결정을 엄중히 우려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주요 무역 파트너 간 긴장 고조에 대해 아세안 외교장관들이 지난달 31일 채택한 공동성명에 표현된 우려에 전적으로 공감한다”고 말했다.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은 즉각 반박했다. 고노 외무상은 “나는 아세안의 친구(국가)들로부터 우리의 수출 관리 조치에 대한 불만을 듣지 못했다”며 “한국은 우리의 아세안 친구들보다 더 우호적이거나 동등한 지위를 누려왔고, 누릴 것인데 강 장관이 언급한 불만의 근거가 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어 “안보 측면에서 민감한 물품과 기술에 대해 효과적인 수출통제를 유지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일본이 가져야 할 책임”이라며 기존 주장을 반복했다.
회의가 비공개로 전환되자 비비안 발라크리쉬난 싱가포르 장관이 일본 비판을 거들었다.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이 제외되도 아세안 국가 수준의 대우를 받을 텐데 뭐가 문제냐’는 고노 외무상의 발언이 그를 자극했다. 발라크리쉬난 장관은 일본이 화이트리스트에 아세안 국가가 한 곳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며 ‘공동번영을 위해 화이트리스트를 줄일 게 아니라 오히려 늘려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왕이 중국 외교 담당 국무위원도 ‘싱가포르 외교장관의 발언에서 좋은 영가을 받았다. 아세안+3가 한가족이 돼야 하는데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 유감’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싱가포르와 중국으로부터 의외의 공격을 받은 고노 외무상은 한국이 한·일 청구권협정을 다시 쓰려고 비판하면서도 수출 통제는 이와 별개의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강 장관은 고노 외무상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고 재반박했다.
한편,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비롯한 미국 측 인사들은 이날까지 방콕에서 한국·일본 측을 연쇄접촉하며 중재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이 이날 각의에서 의결한 개정안 수출무역관리령 정령 시행까지 아직 3주 이상 기간이 남은 만큼 미국은 한·일 양측에 조속한 갈등 해결을 주문하는 방식으로 중재에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강 장관은 이날 오후 열린 한·미·일 외교장관회담 후 기자들과 만나 “미국도 이 상황에 대해 많은 우려를 갖고 있다. 앞으로 어렵겠지만, 어떤 노력을 이룩할 수 있는지, (자신들이) 할 역할을 다하겠다고 얘기했다”며 “오늘 이 사태(일본의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 결정)가 있기 전까지 우리가 끝까지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자는 얘기를 (일본 측에) 전했고, 미국도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전했다.
다만, 일본에서는 각의를 통과한 안건의 공포와 시행을 늦춘 전례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 철회를 하려면 이를 골자로 한 새로운 안건이 각의에서 의결되야 할 것으로 보인다.
방콕=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