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의 극적 반전을 기대했던 외교장관회담이 사실상 ‘빈손’으로 끝나면서 보복에 보복을 쌓는 전면충돌국면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다.
한·일 갈등 상황을 파국 직전까지 몰아가고 있는 것은 일본이다. 한·일 갈등이 경제전면전으로 비화되기 전 외교적 해법을 마련하자는 우리 정부의 제안에 일본은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며 일체 반응하지 않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에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과 외교장관회담을 가진 후 “통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국가 간에는 협의를 통해 결국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는 시간과 여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일본 측에) 분명히 얘기했다”고 말했다. 현재상황을 악화시키지 않으면서 외교적 해법을 모색할 수 있도록 ‘휴전’의 시간을 갖자는 제안이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외면했다. 고노 외무상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안보상 수출심사 우대 국가) 한국 배제 조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채, 기존 입장만 반복했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은 국제법을 위반한 것이고, 한국 정부가 나서서 이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중재노력에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조세영 외교부 제1차관은 이날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미국이 ‘중재’라는 단어는 쓰지 않지만 원만하게 사태가 해결되기를 바라며 노력을 하고 있다”며 “미국의 (중재) 노력에도 일본이 좀처럼 자기 입장을 굽히지 않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밝혔다. 게다가 일본 정부가 2일 오후 개최 예정인 한·미·일 외교장관회담에 앞서 화이트리스트 한국 제외 조치를 단행할 것으로 확실시되면서 3국 외교수장 회담에서도 돌파구 마련은 힘들어 보인다.
일본의 이중적 태도도 갈등 해결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수출제한 조치를 단행하면서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보상 판결 때문이 아닌 안보상의 이유를 들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막상 안보상의 문제가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일본은 우리 정부가 외교 채널을 통해 수출규제 문제를 언급할 때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도 함께 거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상과 원인이 연결되지 않으니 정확한 해법을 찾지 못한 채 논의가 계속 겉도는 셈이다.
정부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키 카드로 일본과 미국을 동시에 압박하는 모양새다. 강 장관은 이날 회담에서 일본이 화이트리스트 한국 배제 조치를 강행하면 “한·일 안보협력 틀에 영향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노 외무상에게 강조했다.
조 제1차관은 “일본 관방장관도 지소미아에 대해 바람직하다고 밝혔고, 일본도 (지소미아 유지가)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며 “(협정이 파기되면) 일본 입장에도 타격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지소미아 파기 카드는 한·일 갈등 중재에 여전히 소극적인 미국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지소미아 파기 카드가 역풍을 부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한 외교소식통은 “한국이 먼저 지소미아 파기 카드를 꺼내들면 일본은 ‘역시 한국은 한·미·일 안보협력에 관심이 없다’는 프레임을 들이댈 것”이라며 “지소미아 유지를 강력히 주문하고 있는 미국이 오히려 한국을 압박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서훈 국가정보원장도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지소미아는 내용상 실익도 중요하고 상징적 의미도 중요하다”며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방콕=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