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1일 수문(水門)이 자동으로 열려 지하 터널에서 작업 중이던 건설사 직원 3명이 사망한 서울 양천구 빗물저류배수시설 사고는 건설사와 서울시가 안전 매뉴얼만 잘 지켰다면 막을 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사고를 방지할 기회가 크게 세 번이나 있었지만 ‘안전 불감증’으로 참사를 불렀다는 지적이다.
빗물저류배수시설 사고는 6년 전에 발생한 ‘노량진 수몰사고’를 연상케한다. 2013년 당시에도 장마 기간 상수도관 공사가 강행됐고 강이 범람해 공사 현장에 있던 근로자 7명이 사망했다. 사고 발생 이후 서울시는 안전 매뉴얼과 대책을 연이어 내놨지만, 이번 사고 때 소용이 없었다.
1일 서울시에 따르면 사고가 발생한 유지관리수직구 근처에는 직원들의 안전 규정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감리자나 안전 관리자가 없었다. 서울시는 노량진 수몰사고 이후 ‘공사장 안전사고 재발방지 대책’을 내놓고 밀폐 작업 공간에 감시인(감리자 또는 안전관리자)을 배치하고 권한을 강화하겠다고 했는데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이다.
현대건설 협력업체 직원 2명은 오전 7시10분에 지하 터널로 내려갔고 사고는 오전 8시9분쯤 발생했지만 감리업체 직원들은 오전 9시에 출근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계약상 감리업체 직원 근무 시간이 8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보니 생긴 상황”이라며 “감리자가 없을 때 이뤄지는 작업에 대해선 감리업체에 사전 보고하는 게 원칙”이라고 말했다. 현대건설 측은 오전 7시 작업 내용을 감리업체에 사전 보고했냐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안전 관리자 역시 사건 장소 근처에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시 관계자는 “사고가 발생한 유지관리수직구는 사실상 공사가 어느 정도 완료되고 시운전하던 중이었다. 안전 관리자는 공사 진행 예정인 다른 장소 근처에서 안전수칙 준수 등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지관리수직구는 공사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동식 통신 중계기, 긴급 알림벨 등 안전시설이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 관계자는 “유지관리수직구가 임시운행과 공사 완료 중간에 놓여있는 상태라 애매하다”며 “이곳에 안전 관리자가 없었다는 게 관련법 위반인지 아닌지 여부는 법 해석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했다.
공사 관리자인 현장소장은 사고 발생 당일 기상청이 오전 5시 양천구의 집중호우 소식을 예보한 것을 확인하지 않으면서 사고를 막을 수 있었던 두 번째 기회를 놓쳤다. 서울시가 2016년 내놓은 ‘돌발강우 시 하수관로 내부 안전작업 관리 매뉴얼’에 따르면 현장 관리 책임자는 일기 예보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강수 확률이 50% 이상의 경우나 육안으로 하늘에 먹구름을 확인하면 즉시 작업을 중단해야 한다.
그러나 사고 당일 아침 공사 현장 관리자 누구도 예보를 확인하지 않았고, 현대건설 협력업체 직원 2명은 평소와 같이 일상적인 업무를 하러 지하 터널에 들어갔다가 참변을 당했다. 현장소장은 “오전 7시엔 예보를 확인했지만, 양천구가 호우주의보 지역에 포함되지 않아 미처 몰랐다”고 해명했다.
사고를 당한 작업자들은 지하에 내려가면서 무전기, 헬멧 외에 다른 안전장치를 가져가지 않았다. 이마저도 무전기는 바깥 사무실과 거리가 멀어지자 통신이 되지 않았다. 이는 작업 공간 내에 있는 근로자가 바깥에 비상상황이 생겼을 때 즉시 확인하게끔 상황전파시스템을 마련한다는 기존 매뉴얼에 어긋난다.
서울시는 양천구 빗물저류배수시설이 해당 안전 매뉴얼들을 제대로 지키는지 관리하지 않았다. 서울시는 전날 ‘공사 안전 규칙은 이미 갖춰져 있다’며 돌발 강우 시 안전 매뉴얼을 제시했지만, 해당 매뉴얼을 담당하는 부서 관계자는 “우리 부서는 하수도 관리 담당이어서 배수 시설의 매뉴얼 점검 여부는 우리 소관이 아니다”고 말했다. 빗물저류배수시설을 담당하는 도시기반시설본부는 해당 매뉴얼 존재도 잘 모르고 있었다.
조원철 연세대 토목공학과 교수는 “매번 사고 발생 이후 지자체와 당국은 매뉴얼과 대책을 내놓지만 이후 제대로 관리를 못 한다”며 “이번 사고 역시 이미 마련돼 있는 매뉴얼만 지켰다면 막을 수 있었다”고 비판했다.
서울 양천경찰서는 전담팀을 꾸리고 이번 사고의 책임이 어디에 있는지 조사에 나섰다. 경찰 관계자는 “전날 현대건설과 협력업체 직원 등 9명을 참고인으로 불렀고 오늘도 조사를 이어가고 있다”며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현장에서 안전 관리에 문제가 없었는지를 살펴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앞서 양천소방서는 이날 오전 5시42분과 47분 쯤 실종됐던 협력업체 소속 미얀마 국적 A씨와 현대건설 소속 안모씨의 시신을 발견해 근처 병원으로 옮겼다.
사망자 유가족들은 황망해했다. 특히 안씨는 결혼한지 1년이 된 신혼부부여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안씨의 아내는 망연자실한 채 서울 양천구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씨는 전날 지하에 남은 동료 두 명에게 호우주의보 소식을 알리기 위해 터널로 내려갔다가 변을 당했다. 그의 외삼촌 고모씨는 “책임감이 강해 사람 구하러 들어간 것 같다”며 “통신 장치도 없이 사지로 몰아넣은 것 아니냐”고 토로했다.
A씨의 동료 쏘맹언(32)씨는 “A씨는 두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아버지와 어머니, 6명의 형제 자매를 미얀마에 두고 홀로 한국에 와 일했다. 월급 중 용돈 조금을 제외하고 꼬박꼬박 집으로 보내던 성실한 친구인데, 이렇게 보내게 돼서 착찹하다”며 눈물을 훔쳤다. A씨의 시신은 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보내질 예정이다.
전날 사망한 현대건설 협력업체 직원 구모씨의 동생(64)은 “갑작스러운 사고로 가족을 잃었는데 서울시나 현대건설 모두 자기 책임이라는 사람은 없고 다들 서로 빠져나가려고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는 “자연사도 아니고 사고사인데 제대로 된 해결도 없이 발인할 수 있겠느냐”며 “어제 시청 공무원도 둘이나 왔는데 본인도 안전 담당이 아니라고 했고 현대건설 직원도 와서 수문이 자동으로 열렸다고만 하는데 그럼 도대체 왜 여기 와서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편 박원순 서울시장은 빗물저류배수시설 사고를 수습하기 위해 지난달 29일부터 오는 2일까지 냈던 휴가를 취소했다. 박 시장은 이날 오전 현장을 찾아 “서울시는 경찰 조사 후 감사를 실시해 책임 소재를 규명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며 “서울시, 양천구, 현대건설이 유가족의 피해에 책임을 다하도록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안규영 박구인 기자 ky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