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로 비판받는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 장훈

입력 2019-08-01 07:29 수정 2019-08-01 10:23
장훈(왼쪽)과 다르빗슈 유. 연합뉴스

“부상이 무섭다면 스포츠를 그만두는 게 낫다.”
재일 한국인 출신으로 일본프로야구의 전설로 불리는 장훈(하리모토 이사오)의 발언이 일본 사회에서 큰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현재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장훈은 지난달 28일 TBS ‘선데이 모닝’에서 여름 고시엔 대회(전국고교야구선수권) 출전권이 걸린 예선 결승전에서 고교 야구부 감독이 간판투수의 부상을 우려해 기용하지 않은 것을 지적했다. 하지만 그의 발언을 놓고 스포츠계는 물론이고 사회 전반에서 ‘스포츠의 투혼’을 놓고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라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에서 연일 이어지고 있는 이번 논란의 출발점은 고교야구 괴물 투수 사사키 로키(18)가 지난달 25일 고시엔 대회 출전권이 걸린 이와테현 예선 결승전에 등판하지 않아 소속팀 오후나토고가 대패한 것이다. 사사키는 고교 시절 오타니 쇼헤이(LA 에인절스)의 최고 구속 160㎞를 넘어 163㎞ 공을 던질 뿐만 아니라 변화구에도 능해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사사키는 지난달 6~24일 4번 출장해 29이닝 435구를 던졌다. 지난 21일에는 12이닝 동안 194구를 던졌다. 이에 미국 독립리그 출신인 고쿠보 요헤이(32) 감독은 사사키의 부상을 막기 위해 결승전에 등판시키지 않았다.

35년 만의 고시엔 진출을 눈앞에 뒀던 오후나토고의 패배 이후 학교에는 지역민과 동문들로부터 항의가 빗발쳤다. 사사키가 던졌으면 지역의 숙원을 이룰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학교는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찰에 특별 경비까지 요청했다.

일본 고교야구의 괴물투수 사사키 로키.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것이 장훈이다. 장훈은 “사사키는 예선에서 4경기밖에 던지지 않았다. 합계 450개에 불과했다. 작년 요시다는 800개 이상 던졌다. 함께 싸운 동료들은 1학년부터 3학년까지 열심히 연습했다. (그들에게) 고시엔 무대는 꿈이다. 부상을 두려워하면 그만두는 게 낫다. (부상은) 모든 스포츠 선수의 숙명”이라고 비판했다.

장훈이 언급한 요시다 고세이는 지난해 여름 아키타현의 가네아시 농고의 에이스로 예선 5경기(749구)를 완투하며 고시엔 진출을 이끌었다. 고시엔 본선에서도 결승전까지 6경기에서 881구를 던졌다. 장훈은 또 “고쿠보 감독은 미국 독립리그 출신이라 미국식으로 생각하고 있다. 미국인은 (어깨를) 소모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동양인은 던져서 힘을 낸다”고 밝혔다.

하지만 장훈의 이날 발언은 여러 스포츠 선수들의 비판을 야기했다. 메이저리거 다르빗슈 유(시카고 컵스)는 SNS에 해당 프로그램을 링크한 뒤 “신룡(일본 만화 ‘드래곤볼’에서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이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망설임 없이 그(장훈이 나오는) 코너를 지우라고 할 것”이라고 썼다. 다르빗슈가 올린 게시물은 15만여개가 넘는 “좋아요”를 받았으며 5만6000여회 리트윗 됐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 선수 나가토모 유토(터키 갈라타사라이)도 SNS에 “무리해서 다치면 마이너스다. 특히나 프로로 살아갈 선수에겐 더더욱 좋지 않다. 감독은 선수를 지키는 게 당연하다. 몇 번이나 이야기하지만 ‘선수 퍼스트’다”고 썼다.

그동안 고시엔 고교야구에서는 재능있는 어린 투수들을 혹사시키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이는 ‘투혼’ ‘근성’ ‘스포츠 정신’ 등으로 미화돼 왔다. 근래 혹사 논란이 일면서 투구수를 제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제대로 실행되지 않고 있다. 투혼을 강조하는 것은 고교야구만이 아니라 일본 스포츠계 전체에 뿌리깊다. 지난해 일본 특유의 역전 마라톤(일정 구간을 여러 선수들이 이어서 달리는 대회)에서는 여성 선수가 심한 골절상을 입고도 손과 무릎으로 기어서 목표 지점까지 완주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스포츠계에서는 장훈의 발언 논란에 대해 “스포츠에서 팀 우선주의 및 투혼 등 정신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구세대와 체계적 훈련과 선수 보호를 우선시하는 신세대가 충돌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번 논란은 스포츠계를 넘어 사회 전반에서도 파문을 일으켰다. 노동계에서는 장훈의 발언이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블랙기업’과 매우 닮아 있는 태도라고 비판했다. 일본 잡지 ‘다이아몬드’는 “고교야구나 블랙기업이나 미래의 젊은이들을 위해서라고 말한다. 젊은이들이 선택한 만큼 ‘(자신을) 완전히 연소하라’고 세뇌 시킨다. 하지만 그 끝은 젊은이의 파멸이다”면서 “블랙기업에서 과로로 자살한 직원들을 보면 다들 자신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회사를 선택했으며 자신의 의지로 과로하다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일본 사회는 비과학적이고 시대착오적인 ‘근성’ 신앙을 버려야만 한다”고 덧붙였다.

또다른 일본 잡지 ‘미모레’는 이번 논란에 대해 “집단성을 중시하는 일본의 폐쇄적인 남성 사회의 문제를 보여준다. 운동하다 다치는 것이 스포츠 선수의 숙명이라는 발언은 개인의 존재나 인권을 무시하는 것”이라면서 “나이든 세대가 ‘내가 하던 시절엔~’이란 투의 발언이 젊은이들을 얼마나 납득시킬지 모르겠다”고 비판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