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열 초점] “제이스 밴이요? 류현진에게 체인지업 못 던지게 한 것 같은 처사죠”

입력 2019-07-31 20:30

“잘 안 쓰는 챔피언도 아니고 어떤 팀에게는 필살기일 텐데, 갑자기 이렇게 밴을 당하면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죠. 류현진 선수가 주특기인 체인지업을 죽어라 연습했는데, 등판 당일 금지된 것과 같은 처사입니다.”

제이스-탈리야 글로벌 밴 소식을 접한 국내 한 리그 오브 레전드(LoL) 프로팀 관계자는 31일 이 같이 말하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지난 26일 라이엇 게임즈는 2개 챔피언에 대해 글로벌 밴을 진행한다고 공지했다. 게임사에 따르면 9.14패치 후 제이스와 탈리야가 동시에 특정 스킬을 사용하면 심각한 게임 지연 현상이 발생해 이 같은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이로써 모데카이저 밴에 이어 제이스와 탈리야도 LoL 대회에서 일정 기간 볼 수 없게 됐다. 다만 이번 주부터 두 챔피언의 밴이 풀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제이스와 탈리야는 대회에서 적잖게 등장하는 주류 챔피언이기 때문에 이번 글로벌 밴이 팀들에 미치는 파장은 컸다. 특히 두 챔피언을 위주로 연습한 팀들은 사실상 전술을 완전히 새로 짜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두 챔피언을 자주 쓰지 않는 팀들도 외부 요인으로 게임 양상이 뒤바뀐 것이 마냥 달갑지 않았다고 한다. 밴픽에 있어서 기존에 염두에 둔 수 싸움을 완전히 새로 정립해야 될 뿐만 아니라 언젠가 이 같은 문제가 본인들에게도 들이닥칠 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업계에서 심각하게 인지하는 이유는 e스포츠의 정식 스포츠화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로 지적됐던 ‘패치 및 버그에 의한 영향’의 문제가 고스란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공정한 경쟁’이 이번 일로 침해됐다는 거다.

글로벌 밴에 대해 주최측과 팀간에 논의가 없었던 건 아니다. 밴이 결정되기 4~5일 전 팀과 한국e스포츠협회, 협회와 라이엇 게임즈 코리아의 접촉이 있었다고 한다. 팀에서 해당 버그에 대한 의견을 개진하면 협회가 이를 수렴해 게임사에 전달하는 방식이다. 담원은 당시 가장 적극적인 제스처를 취한 팀이다. 제이스와 탈리야 둘 다 팀에서 없어선 안 될 핵심 챔피언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목경 감독은 영상과 화면 캡쳐 등을 직접 편집해 보내는 등 적극적인 어필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복수의 팀들이 해당 챔피언 밴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글로벌 밴은 결국 강행됐다. 미국 본사의 결정이었기 때문에 라이엇 게임즈 코리아 입장에서도 즉각적인 조율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단순 두 챔피언이 빠진 것처럼 보이지만 전술상 받는 영향은 훨씬 컸다. 어떤 챔피언이 주축이 되느냐에 따라 나머지 포지션도 큰 작용을 받기 때문이다. 대부분 팀들이 그러하듯, 담원 역시 팀 내부적으로 ‘오버파워(OP) 챔피언’에 대한 티어 정리를 꾸준히 해왔다. 근래에는 제이스, 탈리야가 최상단 챔피언으로 분류됐고, 이를 중심으로 다양한 방식의 전술연구가 이뤄졌다고 한다. 이 가운데 글로벌 밴에 대한 위화감은 시합 당일까지 없었다. 전날 열린 경기에서 제이스-탈리야의 글로벌 밴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원은 경기 당일 오전에 글로벌 밴 통보를 받았다. 그간 글로벌 밴은 종종 있었지만, 이 같이 경기 당일에 공지된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 전날 새벽까지 연습과 전략 회의를 한 담원은 시합 당일 조금 늦은 기상을 했다. 식사를 하고 바로 경기장으로 향하는 일정이었다. 담원은 글로벌 밴에 대응한 그 어떤 대책도 수립하지 못한 채 경기장에 입성했다. 체념과 답답함이 뒤섞인 한 판 승부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김 감독은 “챔피언은 축구로 치면 선수와 같다. (이번 결정은) 가장 잘 하는 선수를 빼고 경기를 치르라는 통보나 다름없었다”면서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는 “금요일에 우리가 꺼낸 챔피언 조합은 근래에 전혀 합을 맞춰보지 못한 것이었다. 선수들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경기 당일 라이엇 코리아에서 여러모로 배려를 해 준 덕분에 시합을 치르는 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선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이번 이슈를 접한 또 다른 게임단 관계자 A씨는 선수협회를 꾸리거나 사무국 회의를 체계화하는 방식으로 이런 문제에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A씨는 “선수협회가 따로 있지 않고, 사무국 회의도 이와 같은 이슈를 직접 대응할 만큼 충분히 열리지 않는다”면서 “결국 이런 일이 발생하면 피해는 팀과 선수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오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프로 스포츠에 준하는 체계적인 대회 운영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C씨는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가장 인기가 많은 e스포츠 대회다. 시즌이 진행되는 중에 패치나 버그로 변수가 생기는 것을 줄여나갈 확실한 방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라이엇 게임즈 코리아 관계자는 “대회 중에 버그가 발생할 가능성을 무시하는 것보다, 대회의 무결성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 문제의 소지가 있는 챔피언을 사용 금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기를 치르는 데 불편을 겪으신 팀과 선수들에게 매끄럽지 못한 운영을 한 데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이러한 문제가 최소화될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e스포츠 대회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 충분한 조건이 갖춰져야 비로소 시합을 치를 토대가 마련된다. 지난 27일 태국 방콕에서 열린 ‘2019 MET 아시아 시리즈: 펍지 클래식’ 둘째 날 경기에서는 급작스런 정전으로 한 시간 가까이 대회가 지연되고, 당시의 인 게임 플레이가 모두 무효가 되는 상황이 빚어졌다. 이처럼 게임 내 문제뿐 아니라 외적인 탄탄함도 필요한 게 e스포츠다. 업계에서는 이러한 이슈들이 완벽하게 해결되긴 어렵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문제를 최소화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난해한 문제들이 산재해 있지만 그럼에도 e스포츠는 제 갈 길을 계속 가야 한다. e스포츠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가장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나가고 있는 유망한 스포츠 종목이다. 보다 체계적이고 확고한 리스크 관리가 필요하겠다.

이다니엘 기자 d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