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이야기] 89. 인간과 삶을 성찰하는 태도는 묵직하고 웃음은 살아있는 박근형의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

입력 2019-07-31 09:19

한국사회를 전투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박근형 연극이 달라졌다. <해방의 서울>이후 선보인 신작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나온씨어터, 7월 5일~21일)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두 형제의 남루한 삶과 인생 이야기를 애잔한 가족사(史)로 담아내는 작품이다. 정직하게 땅을 섬기며 농부로 살아가는 형 창호의 시골은 ‘가뭄’으로 땅이 갈라지고 성공한 아들 재철은 미투로 몰락해 자살로 극단적인 삶을 선택한다. 동생 창식은 성공의 욕망으로 시골을 떠난 뒤 교도소를 전전하며 쪽방에서 살아가는 유명한 노름꾼으로 아들은 대를 이어 노름판을 다닌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는 나약한 인간에게는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가뭄’의 자연현상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을 지키고 살아가는 창호와 형제의 가족사를 그리며 인간, 운명, 삶과 인생, 죽음 등을 묵직한 성찰의 시선으로 담아낸다. “이게 박근형 연극 맞아?” 할 정도로 울림은 묵직하고 극단 골목길의 예리한 풍자와 웃음은 살아있다.

박근형의 시선과 연극

극을 쓰고 연출을 하는 박근형 연극은 서사의 생략과 비약의 확장성으로 때로는 엉뚱한 설정에도 극단 골목길 배우들의 날것 연기로 채워져 예리한 현실풍자와 조롱으로 충격을 던지며 한국사회 문제들을 날카롭게 진단해 왔다. 뒤틀린 가족사, 친일과 역사, 남루한 삶, 인간 내면과 잔혹성, 삶과 인생의 부조리, 부와 가난, 삼류인생, 정치의 실종 등으로 환기되는 소재들은 한국사회의 부조리한 현상과 왜곡된 역사를 매섭게 그려냈다. 박근형이 무대로 비틀어대는 언어는 막장까지 달리고 버텨도 부조리하고 불균형한 현실 세계이며 한국사회 정치는 오염되어 있는 무대로 전경화 된다. 역사는 종결된 것이 아니라 동시대로 환시 시켜 치유해야 할 역사로 소환된다. 농담처럼 비트는 언어는 날이 서 있고 풍자의 웃음 뒤로 한국사회 오염된 환부를 겨냥한다.

박근형 연극은 <쥐>(1998)를 출발로 <청춘 예찬>(1999) 는 비루한 삶과 인생, <경숙이, 경숙이 아버지>(2006)는 전쟁의 역사와 아버지의 부재, <만주전선>(2015)는 친일(親日)과 혼혈의 역사를 그려냈고 <선착장에서>(2005), 돌아온 엄 사장> (2008), <엄 사장은 살아있다>(2015) 3부작을 통해서는 청렴한 대한민국 정치의 실종과 한국사회 정치의 오염 현상을 담아냈고 잔혹함으로 더는 놀랄 것도 없는 세계를 담아내는 <너무 놀라지 마라>(2009)는 충격을 안겨주었다.<모든 군인은 불쌍하다>(2016)는 초계함 사건과 반복되는 세계전쟁을 소환시키며 나약한 인간의 죽음을 통해 전쟁과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굵직한 시선을 던졌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2016) 는 박정희와 박근혜 그리고 유신 정치의 유산(遺産)을 날 선 조롱과 풍자로 돌진했다. <해방의 서울>(2017)은 창경궁을 배경으로 정화되지 않고 있는 친일과 혼혈의 역사가 절대 권력과 부(富)로 재생산되는 한국사회의 민낯을 박근형식으로 그렸다면 이번 신작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 는 인간의 삶과 인생을 성찰한다.

두 형제의 가족사와 삶을 극 전반(창식이와 거북이 그리고 경애 이야기)에는 박근형식으로 꺼내고 시골집 배경으로 창호의 삶과 재철이의 인생 이야기 중첩되면서 한 장면으로 연결된 TV 드라마처럼 두 형제의 삶과 인생을 올려놓는다. 가뭄으로 찌든 가난과 흙수저 인생은 부로 전진할 수 없는, 더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한국사회 현상’으로 투영한다. 가난은 대물림 되는 업(業)으로 환치되고 성공과 몰락으로 파멸된 인간의 죽음은 인과응보(因果應報)로 두 형제의 가족사를 담아내고 있다. 빗줄기가 가뭄의 땅속으로 흘러갈 수 없는 자연현상은 희망의 햇빛이 없는 정체된 현상이다. 대대로 땅을 섬기며 산비탈에 올라 밭을 갈고, 희망의 씨앗을 심어도 가난을 벗어 날 수 없는 남루한 삶과 인간(가족)의 운명에도 비를 기다리며 삶의 희망을 놓지 않는 극 중 인물 창호(성노진 분)가 있기에 한국사회는 희망적이다. 자식의 비극적인 죽음과 몰락에도 질긴 빗줄기의 기다림은 마지막 장면에서 뉴스로 ‘호우주의보’ 소식을 듣게 된다. 죽음과 삶, 인생의 운명은 자연이며 계절이다. 자식의 죽음을 뒤로하고 삽을 들고 희망을 품으며 다시 밭으로 향하는 장면에서는 자연의 순리로 살아가려는 한 인간의 숭고한 내면을 투영한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긴, 삶의 고단함 ‘인물들 이야기’

가뭄이 길어지는 여름, 인간이 서 있을 수 없는 무더위, 삶을 잘라내는 질긴 추위의 겨울은 살아 숨을 쉴 수 없는 재앙이며 죽음이다. 박근형 희곡을 따라가는 재미는 극 중 인물의 인생과 삶의 결이 다른 존재들이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긴 계절을 지키며 촌(村)에서 밭을 섬기고 살아가는 극중 인물 창호(성노진 분)는 부모 묘가 있는 고향 땅에서 농사를 업으로 살아간다. 어머니(강지은 분)도 가난에도 자식 걱정하고 뒷바라지하는 한국사회 어머니의 전형으로 사찰을 오르며 공을 들이는 절실한 불교 신자다.

아들 재철(서동갑 분)은 흙수저로 태어났다. 명석한 두뇌로 ‘개천에서 용’이 되어 경제학 대학교수가 되었고 금수저 패션디자이너 은희(방은희 분)와 결혼한 뒤에 TV방송 시사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추며 한국사회에서 성공한 인물이다. 제철은 사회적으로 성공을 했지만, 한국사회 쓰나미가 된 미투 사건을 환기하며 몰락하게 된다. 성추행 사건으로 고소를 당하고 도피하듯 고향으로 내려온 재철은 처제까지도 성폭행했다는 사실이 아내의 입을 통해 드러나면서 극의 종점에서 자살하게 되고 연출은 그로테스크한 장면으로 충격을 던진다. 아내도 남편의 죽음 이전에 시부모를 만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극단적 선택을 한 것으로 암시하며 그려진다.

동생 창식(김은우 분)은 트랙터 살 돈을 훔쳐 서울로 상경해 영등포에서 유명한 노름꾼이 되었고 아들(재호)은 갬블러 아버지를 존경하는 노름꾼이다. 아들 재호는 경애(이봉련 분)을 겨울에 만나 아이가 태어났다고 이름을 ‘겨울이’라고 지었다. 출소해 쪽방에서 살아가는 아버지한테 겨울이와 경애를 맡기고 전국을 유랑하는 인물이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는 각기 다른 삶과 인생을 살아가는 두 형제의 가족사를 병치시키며 질긴 가난과 가뭄으로 부를 탈환할 수 없는 사회를 투영한다. 여전히 가난을 탈출할 기회가 없는 땅, 가난의 가뭄으로 성공과 희망이 응고되어 있어도 삶에 만족하며 살아간다. ‘겨울이’도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긴 가난의 가뭄으로 대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업의 핏줄이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는 극 중 인물을 바라보는 박근형의 시선이 전작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전작에서는 탈출구 없는 비루한 삶과 인생, 막장을 달리는 인간, 아버지의 부재와 극단적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한국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부조리한 현상들을 박근형의 시선과 언어로 전투적으로 다루어 왔다. 이번 작품은 햇빛으로 갈라져 가는 땅과 가뭄 사이로 삶과 죽음, 인간의 운명을 성찰하며 인생의 희망은 살아난다. 극 마지막에 재철이가 목을 매고 자살한 후에 내리지 않을 것 같은 비가 쏟아진다. 비극적 죽음 뒤로 창호는 “갈 데가 어딨어, 밭에.. 비가오잖아!”하며 삽을 들고 집을 나서고 강아지 메롱이도 목말라 허덕이는 가뭄에 다산(多産)을 한다. 비극적인 가족사와 죽음, 가난한 인생에도 삶은 여전히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축제다.

더운 여름, 겨울의 반복

형제의 가족사와 인생은 여름은 덥고 겨울은 온기 없는 삶이다. 삶에 햇빛을 받지 못하고 영등포를 전전하며 노름으로 인생 막장을 달리면서도 전설적인 노름꾼이다. “가난한 사람은 과거에 매여 사는 거야” 경애를 향한 거북이의 대사는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긴 삶을 살아가며 평생 가뭄의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찌든 삶으로 채워지는 과거이며 현재로 이어지는 인생이다. 희망이 없는 가뭄의 더운 여름과 인생을 녹일 수 없는 추운 겨울의 반복이다. 인생과 삶은 삽을 들고 희망의 불을 밝히며 오늘도 빗줄기를 기다리며 밭을 지켜야 하는 고단한 삶이다. 창호는 농부의 삶을 업으로 받아들이며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살아간다. 그것이 인생이다. 한국사회에서 가난은 부로 진입할 수 없다. 가난의 사슬을 끊을 수 없는 과거는 현재이며 과거로 매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 극 중 인물들은 내면의 상처로 온전치 못하다. 창식이도 “잘 살아 보겠다” 는 출세의 욕망은 노름꾼으로 교도소를 전전하며 쪽방 집을 벗어날 수 없는 삶의 연속이다. 아버지의 찌든 가난과 삶은 아들(재호)로 대를 이어서 이어진다.

거북이(오순태 분)도 도박을 레저스포츠로 즐기며 평생 창식이와 노름판을 다니며 노년에 접어들었고 재철이는 사회적 성공에도 미투로 몰락과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온전한 인물은 창식(성노진 분)이 유일하다. 가난한 인생이지만 평생 농부로 정직하게 밭을 일구며 살아간다. 이들에게 되돌아오는 것은 땅이 타들어 가는 가뭄과 죽음뿐이다.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는 여성이 희생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는데 어머니(강지은 분)은 아들과 남편한테 헌신적인 어머니로, 은희(방은희 분)는 재철의 사회적 성공을 뒷바라지하면서도 남편의 도덕적 추락에 극단적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암시(暗示)된다. 경애(이봉련 분)도 세상 사람들이 재호를 욕해도 남편이고 희망적인 존재다.

가뭄과 죽음 “희망은 여전히 살아있는 무대”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는 창식 출소 장면으로 시작된다. 허름한 시골 창호 집을 무대 전면에 배치하고 이동식 칸막이로 장면과 공간을 구분한다. 고향 친구 거북이(오순택 분)은 친구 창식이 출소파티를 경쾌하게 열어주고, 두 사람은 출소 기념으로 낚시터로 향한다. 낚시터로 가는 길도 박근형답다. 목조의자에 앉아 카카오 택시를 능청스럽게 부르고 ‘카카오 택시’라는 창식이 말에 교도소 복역 기간을 짐작하게 한다. 의자는 택시가 되고 두 사람은 “애기능 낚시터 과부가 만든 동치미나 이빠이 마시자”며 택시 풍경을 웃음으로 그려내고 아들(겨울이)을 아버지한테 맡긴다는 재호 전화로 무대는 이혼하게 되는 재철이 집으로 바뀐다. 경애와 겨울이 이야기, 재철의 이혼, 창호 시골집, 제철이와 명환의 만남, 창식과 거북이의 시골집 방문, 은희의 죽음과 재철이의 자살로 이어지는 연극은 두 형제 가족과 인생사를 달고 극단 골목길답게 달린다. 창호 시골집 풍경으로 바뀌면 무대는 찌든 가뭄의 여름이 된다. 살아가는 농촌집 수도에는 물 한 방울도 말라 있고 삶의 희망은 찌든 여름과 가뭄의 연속이다.

마당에 누워 있는 메롱이(이상숙 분) 반려견도 가뭄의 더위에 허덕인다. 연극무대에서 반려견의 역할을 배우가 의인화해 표현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번 작품에서는 불교 윤회 사상의 시선으로 인간으로 의인화해 설정한 것처럼 그려졌다. 어머니(강지은 분)도 시골 인근 사찰에 올라 불공을 드릴 정도로 독실한 불교신자이고, 스님에게 받은 부적의 영험을 믿는 인물이다.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자연과 죽음, 생명이다. 창호는 고향으로 찾아온 창식을 데리고 살날 얼마 남지 않은 인생, 누울 자리를 보고 오자며 부모 산소가 있는 선산에 다녀온다. 재철과 은희의 비극적인 죽음과 아기의 생명(겨울이)과 메롱이의 다산 등이 작품에 섞여지면서 인간은 윤회하며 가난의 업과 인과응보는 죽고, 살아서도 반복된다. 자연처럼 삶과 죽음이 흩어 지나가고 살아가는 삶과 가난한 인생 사이로 묵묵히 땅을 파고 지키는 기다림은 인생의 가뭄을 씻겨줄 희망의 빗줄기가 내린다는 설정으로 한국사회를 희망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박근형의 시선이 변화된 것은 재철이 죽음 이후 설정이다. 전작 작품에서 죽음의 설정들은 인물들이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참혹한 현실 세계다. 죽음으로 내몰리는 비루한 삶과 인생들이다. 삶의 막다른 골목까지 전진하며 발버둥을 치고 살아가는 투사 같은 인간들이다. 그러나 박근형의 신작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의 인물들은 가난해도 각자 방식으로 살아가고 삶을 받아들인다. 고단하지만 즐겁게 살아간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성공을 한 인물이 추악한 욕망으로 극단적 죽음을 선택한다. 재철이 자살로 죽음에 이를 때까지 연출은 삶과 인간의 내면을 대금연주로 따라간다. 특히 장면 전환 사이에 대금연주를 무대로 전경화 시키면서도 장면을 효과적으로 연결시켰고 김민기의 노래 <가뭄>, <백구>, <기지촌>은 박근형의 <여름은 길고 겨울은 길다>의 삶과 인생의 궤적을 그려낸다. 그동안 한국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극단 골목길 배우와 박근형식 풍자로 웃음을 달고 날카롭게 그려왔다면 이번 <여름은 덥고 겨울은 길다>는 한국사회 엘리트층의 성공과 몰락, ‘한번 가난은 영원한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과 인간의 삶을 ‘가뭄’을 통해 은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번 작품에서는 배우들의 연기가 극의 균형이 깨질 수 없도록 전체를 채웠다. 특히 오순태(거북이)와 김은우(창식)는 웃음과 진지함으로 극단 골목길스럽게 장면을 생명력 있게 살려냈다. 특히 김은우는 출소부터 극 중 인물의 표정을 찌든 가난으로 벗어날 수 없는 응고된 표정의 캐릭터와 분절시키는 대사처리로 교도소를 전전하는 노름꾼의 극중 인물로 살려냈다. 이봉련도 극이 무거워지지 않도록 받쳐냈다. 창호의 시골집 장면부터는 사회적으로 몰락하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무거운 내면으로 서동갑(재철)은 무대를 채웠고, 성노진(창호)도 평생 밭을 일구고 살아온 아버지를 그렸다. 강지은(어머니)은 극중 인물의 무거움을 유쾌한 언어와 감각적인 연기로 장면을 살려냈고 이호열(집배원 명환역)도 능청스러운 충청도 사투리 연기로 장면을 채웠다. 오랜만에 무대로 돌아온 방은희(은희역)도 존재감을 드러내며 극중 인물을 그려냈다. 극단 골목길은 <해방의 서울>을 8월31일부터 9월 1일까지 광명시민회관 대공연장 무대에 올린다. 인천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는 10월11일부터 12일까지 공연한다. 요즘 한일관계에서 반드시 볼만한 연극이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