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대 강 대치국면이 계속되던 한·일 갈등이 이번주 최대 분수령을 맞을 전망이다. 한·일 외교수장이 태국 방콕에서 열리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나란히 참석하면서 외교적 해법이 마련될 가능성이 생겼다. 그러나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안보상 수출심사 우대 국가)’ 한국 배제 여부 또한 다음달 2일쯤 결정될 예정이라 양측의 긴장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고노 다로(河野太郞) 일본 외무상은 오는 31일 ARF 참석을 위해 각각 한국과 일본을 출발한다. 외교가에서는 31일이나 다음달 1일 방콕에서 한·일 외교장관회담이 열릴 가능성이 제기된다. 외교부는 아직 확정된 것이 없다는 입장이지만, 정부 관계자는 28일 “상황을 지켜봐야 할 것 같다”며 가능성을 열어놨다.
강 장관과 고노 외무상의 ‘방콕 회동’이 성사된다면 한·일 갈등 완화의 분명한 계기가 될 수 있다. 일본은 지난 24일 세계무역기구(WTO) 일반이사회에서 한국 측의 1:1 대화를 거부하고, 19일 고노 외무상이 남관표 주일대사에게 외교적 결례를 저지르는 등 한국과의 외교 협의를 거부하거나 감정적으로 대응해 왔다.
하지만 강 장관과 고노 외무상이 지난 26일 오전 약 20분간 통화하면서 양국 기류가 조금씩 변화하는 분위기다. 한·일 외교수장의 통화는 지난 4일 일본이 한국 반도체 소재 3개 품목에 대한 수출제한 조치를 취한 이후 처음이다. 강 장관은 경제보복 조치 철회를 요구했고 고노 외무상은 일본의 입장을 재확인하며 원론적 입장을 주고 받았지만, 양측은 각급 외교채널과 다자회의 등 각종 계기를 활용해 의견을 교환하고 대화와 소통을 지속하기로 했다. 정부 당국자는 “두 장관이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처음으로 통화를 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북한의 지난 25일 단거리 탄도미사일 발사가 한·일 간 소통의 계기를 마련한 측면도 있다. 실제 두 장관은 통화에서 한·일 관계 뿐 아니라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한 의견도 교환했다. 청와대가 재검토 의사를 꺼냈던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도 북한 미사일 발사를 계기로 정상가동됐다.
그동안 한·일 갈등 중재에 미온적 태도를 보인 미국의 태도 변화도 감지된다. 미 국무부 고위관료는 26일(현지시간) 전화 브리핑에서 “한·일 간 갈등을 크게 우려한다”며 “한·미·일이 (ARF 기간 중) 한자리에 모이는 기회가 있을 것이고, 3국 대표가 다 함께 모이기를 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양국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생산적인 방법으로 관련 사안을 제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은 북한이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핑계로 북·미 실무협상 개시를 거부하고, 단거리 탄도미사일 도발을 재개하는 상황에서 북핵 협상의 중요한 파트너인 한·일 간 갈등을 더이상 방치하긴 어렵다. 미국은 그동안 직접적인 개입은 하지 않으면서도 한·일 양측에 조속한 갈등 해결을 주문해 왔다.
다만, 낙관하기엔 이르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에 따르면 일본은 다음달 2일 열리는 각의에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상정하는 방안을 조율 중이다. 개정안이 각의를 통과할 경우, 한·일 무역 전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품목 1000여개에 대한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가 시행돼 양국 관계는 당분간 회복되기 어려운 국면에 진입하게 된다.
또 방콕에서 강 장관과 고노 외무상의 외교장관회담이 불발되고, 한·일이 날선 공방만 주고받으면 갈등이 겉잡을 수 없이 증폭될 수 있다.
최승욱 기자 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