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박서보, “단색화 인기 주춤? 팔 물건이 없어서 그래”

입력 2019-07-25 17:31
택시기사가 주소를 검색하니 ‘박서보 기지’라고 바로 떴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661㎡(약 200평) 단독주택 자리에 조병수 건축가가 설계한 4층 건물 박서보 기지는 자택이자 작업실이며 수장고였다. 집을 찾아오는 컬렉터에게 작품을 보여주는 갤러리까지 갖췄다.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브랜드가 된 ‘묘법’의 초기 시리즈부터 최근작까지 129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회고전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전이 한창이다. 박서보(88) 선생을 지난 18일 ‘박서보 기지’에서 만났다. 거실의 통유리로 내다보이는 ‘이끼 정원’이 아주 미니멀해보였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 겸 작업실인 '박서보 기지'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갖고 있는 박서보 작가. 최종학 선임기자

전시회 소회를 묻자 “이렇게 유명해질 줄 알았나. 올해 살고 볼 일이야”라고 운을 떼더니 “지난해만 22명이, 올해도 벌써 18명이 이 집을 찾았다”며 갤러리를 구경시켜줬다. 미국의 억만장자 스티브 코헨도 자신의 작품을 사갔다고 자랑했다.

박서보는 단색화의 대표주자이자 교육자·행정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홍익대 사단을 거느린 패권주의자라는 비판도 따라다닌다. 그의 광폭 행보에 대한 호오(好惡)가 있긴 하지만, 화가 인생에서 보였던 추진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1956년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반대 선언’을 발표해 기성 화단에 도전했다.

“예술은 그 시대 산물이다. 우리는 전대미문의 동족상잔을 겪었다. 나라는 완전히 폐허가 됐다. 그런데 그림은 1920년대, 1930년대식이었다. 광주리와 ‘이조백자’가 있거나 닭을 시장에 팔려고 가는 대단히 목가적인 그림이야. 이것은 케케묵은 사실주의이거든. 그 시대 정신병자들인 거지. 우리는 전쟁을 겪었어. 거기에 대한 분노와 문제 제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전람회를 왜 하냐 이거지. 반성 못 하는 국전은 없어지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반대한 거지요. 국전 하는 사람한테 나는 뿔 딸린 도깨비였어요. 그래서 삶이 궁했지. 그래도 굴해본 적이 없어요.”
박서보 기지의 이른바 '이끼 정원'. 바위와 이끼만으로 절제된 정원 풍경을 연출했다.

-그때 구미에서는 추상이 유행했었다. 반 국전은 추상을 하자는 거였나.

“구상을 하더라도 그 시대 맞는 걸 하면 돼요. (베르나르) 뷔페의 초기 작품을 제일 좋아합니다. 대학 나온 후였는데, 누가 뷔페의 작품이라고 책을 보여줬어요. 캔버스 살 돈이 없으니 침대 까는 시트 천으로 캔버스를 짜고 어디서 싸구려 흰색을 사다가 바르고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렸어요. 연필로 수백 번씩 그어서 말이에요. 연필이 흰 오일하고 섞여서 묘한 불안한 분위기가 나온 거지. 비쩍 마른 예수의 상, 비쩍 마른 사람들이 무릎 꿇고 기도하는 표정을 보세요. 이런 것들이 그 시대 아픔을 정확하게 표현한 거지.”

-(연필로 선을 긋는) ‘묘법’은 뷔페의 영향을 받은 것인가.

“그건 다른 맥락이다. 연필은 창조하려고 쓰는 게 아니라 나를 허무는 갈고리 같은 거다. 연필로 수없이 반복하고 반복함으로써 내게 그림은 수신을 위한 수행의 도구가 되는 거지요.”

-‘회화 No. 1’으로 국내 최초 앵포르멜(2차 대전 후 프랑스에서 일어난 추상으로 표면이 끈적끈적한 것이 특징) 작가로 평가받았다. 오히려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가 잭슨 폴록(물감을 흩뿌리는 방식의 추상표현주의)과 닮았다.

“그 당시 그림 재료가 없었어. 제일 싼 게 을지로 페인트 가게에서 파는 미제 무광 에나멜이었어요. 에나멜을 사려면 종로 화신 네거리를 지나가야 했는데, 거기 건물들이 다 폭격을 맞았어요. 건물 1층이 뻥뻥 뚫리고 가느다란 철근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런데 에나멜은 유화 물감하고는 달리 발라도 두께 감이 생기지 않아. 바르면 먹처럼 쫙 퍼져나가지. 그걸 가지고 흘리고 번지게 해본 거야. 무너진 콘크리트 더미를 보고 나도 모르게 그런 그림이 나왔던 거예요.”
한국 최초의 앵포르멜 작품이라고 주장하는 <회화 No.1> (1957).캔버스에 유채, 95x82cm.

-그 작품을 두고 앵포르멜이라는 용어를 직접 썼나.

“나는 그런 용어 자체를 몰랐지. 그런데 1957년에 그린 그 그림을 58년 종로의 화신갤러리에서 연 현대미술가협회전에 내놓았어. 이세득이라는 선배가 오더니 ‘이게 세계적으로 유명한 앵포르멜인데’ 하셨어. 그 양반은 일본에서 사업하는 친구들이 미술책을 사다가 주는 거야. 그래서 아는 거지. (프랑스 비평가) 미셸 타피에가 쓴 ‘다른 미학을 위하여’가 있어. 앵포르멜 선언을 한 거지. 내가 처음 그 작품을 했을 때 타피에 앵포르멜 선언을 했었다. 그게 번역이 됐으니 빌려줄 테니 읽어보라고 해서 내가 열흘 읽고, 김창렬한테 주면 읽고, 그렇게 서로 돌려봤어. 그다음에는 정식으로 앵포르멜 영향을 받은 거예요.”

-그럼 최초의 앵포르멜 작품이 맞나?

“그렇지요. 그 당시에 앵포르멜은 나 하나였어. 다른 사람은 모두 구상작품을 냈고.”

그의 평생의 대표작이 된 ‘묘법’에 관해 물었더니 “왜, (미국 작가) 사이 툼블리를 닮았다고 그러려고”라고 먼저 반문했다. 그러면서 탄생하게 된 사연을 이야기했다. 그가 학내 갈등으로 홍익대 교수직을 사표 낸 1966년 무렵이었다.

“세 살배기 둘째 아들이 책상에 앉아 제 형이 쓰는 국어 공책의 네모 칸 안에 글자를 집어넣으려고 애쓰더라고. 그게 안 되니까 화가 나서 빗금을 확 긋고는 포기를 하는 거야. 내가 찾던 게 그거였어. (미술) 대학 와서 계속 ‘너는 누구냐. 네 놈이 계속 해왔던 게 서양 놈 했던 찌꺼기를 했던 게 아니냐’라고 계속 반문을 하다 결국 답을 책을 읽었어요. 노자 장자 불경까지 죽자사자 읽은 거야. 선비가 수신하는 것처럼 자기를 비워야 한다는 걸 그때 깨달았어요. 어떻게 비우냐. 그 방법론을 몰랐다는데 둘째 아들의 포기를 보고 힌트를 얻은 거예요. 그렇게 남 안보는 데서 4, 5년을 지속해서 연습한 거지.”
박서보, <묘법(描法) No.6-67>, 1967, 캔버스에 연필과 유채, 64.8x64.8cm, 작가 소장.

그는 당시에 선보였던 옵아트적인 작품에 대해 회고했다. “옵아트는 팔레트가 아닌 눈에서 혼색이 되는 시각착란을 일으키는 것이지만 나는 색띠를 그린 것”이라고 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성공한 뒤 한국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면서 전통을 강조할 때 나온 것이라고했다.

“그건 색띠거든. 색동저고리의 색띠는 무속에서 나온 거야. 내가 그 시대를 가장 부끄러워하면서 그 시대에 몰입했던 거더라고. 시대가 그렇게 무섭더라고.”

‘묘법’ 1호는 1967년 나왔다. 세상에 처음 공개한 것은 1975년 일본 동경화랑에서 열린 ‘한국 5인의 작가-다섯 가지 흰색 전’에서였다. 이동엽 권영우 박서보 서승원 허황 등이 초대됐다.

-동경화랑 전시 이후 한국에서는 모노크롬이 크게 유행했다(단색화는 ‘단색조’ ‘한국적 모노크롬 ’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그렇지. 내가 신문에 (기고해서) 무위자연론을 한 창 내걸 때였으니까. 자기를 비워라, 비우기 위해서는 자연의 색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거든. 서양 작가의 작품은 그냥 새카맣지만 우리는 거무스름해. 어머니들이 우리를 키울 때 아궁이에 불 때서 밥 짓고 했는데, 천장이고 벽이고 온통 거무스름하게 되지. 그런 게 가장 자연의 색이에요. 서양 작가들이 검정은 한 번에 칠한 거라 깊이가 없어요.”

-그런데 흰색이었다.

“‘5가지 흰색 전’을 준비하려고 동경화랑에서 왔을 때 내가 작가들 작업실로 그들을 다 안내했지. 그런데 그 사람들이 흰색에 꽂힌 거야. 조선총독부가 만든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는데, 한국 아낙네들이 흰색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지. 이조백자의 오묘한 흰색도 그렇고. 동경화랑 사람들이 거기서 힌트를 얻어 ‘다섯가지 흰색 전’을 연 거야. 그 때 하종현, 정창섭도 소개했지만 다 안 된 거지. 그 사람의 기준에 맞지 않는 거지”.

당시 5가지 흰색전은 아사히신문에서 그 해 열린 전시 가운데 ‘베스트 5’ 로 선발했다고 했다.

“한국이 일본보다 앞섰다는 얘기가 나왔지. 자기 전통하고 결부해 자신이 방법론을 제시했으니까. 일본에서 난리가 난 거야. 나는 100호짜리 4,5점을 냈는데 다 팔렸지.”

박서보,< 묘법(描法) No.01-77>, 1977, 르몽드지에 연필과 유채, 33.5x50cm, 작가 소장.

-당시 한국에선 모노크롬이 유행해 작가들의 캔버스가 모두 허옇게 변했더라는 얘기도 있었다.

“미니멀은 최소한의 표현을 하라는 거야. 대단히 개념적으로 접근해서 개념적으로 끝나지. 거기에 무슨 정신의 세계나 신체가 개입하지 않아. 우리는 신체를 통해서 하거든. 거기에 물성이 생기고 정신성이 생기거든. 바로 이점이 한국의 단색화에 전 세계가 열광하는 요소라고요.”
박서보, <비키니 스타일의 여인>,1 968, 캔버스에 유채, 130x89cm, 개인 소장.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옵아트로 분류했지만, 작가는 민족주의를 주창했던 박정희 정권 하에서 전통 색띠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그런 생각을 단색화로 다 분류되는 작가들이 다 공유한 거냐.

“나는 늘 그런 걸 떠든거지. 전국을 다니면서 강연하고. 작가들 설득하고. 한 시대는 개인으론 안돼요. 얼마 전 이용우씨가 나한테 상하이에서 전화를 했어. 이우환씨의 상하이 개인전 뒷풀이 때 ‘한국 현대미술이 박서보 없으면 절대 안 된다. 그 작가들 다 설득시켰다”는 걸 이우환이 다 밝혔다고 했다. △△△, OOO 다 변화하도록 내가 만든거야. 한 시대는 개인으론 안돼. 그러니 집단지성 얘기가 나오는 거라고.”

-왜 박정희 정권에서 단색화가 나왔을까.

“83년 한일종이전이 일본에서 열려 참가했다. 그때 미국인 청중이 이런 질문을 해왔어요. ‘한국 현대미술은 대단히 금욕적이다. 그것이 혹시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로서 그런 것이 아니냐’라고. 그래서 나는 정치적인 발상을 한 적이 없다고 부정을 했거든. 그런데 그 말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예술은 그 시대 산물이니까. 나중에 ‘나를 비운다는 것도 그 시대에 대한 저항 아니었나 생각이 든다’고 이우환 씨한테 얘길 했더니 ‘그럴 수 있겠다’고 동의하더라고요.”

-90년대 중반 들어 ‘색채 묘법’ 작업을 하고 있다. 왜 칼라를 쓰게 됐냐.
“지구가 스트레스 병동화 되고 있다. 묻지마 살인도 일어나고. 그림이 이미지인 시대는 20세기로 끝내야 한다. 그림이 흡인지가 돼서 상대의 불안정과 불행을 보두 흡인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칼라를 해서 손맛을 입혀야 한다.”

-2013년 이후 수년간 고공행진을 하던 단색화 인기가 주춤하고 있다(생존 작가 중 작품값이 10억 원이 넘는 ‘10억 원 클럽’ 3인이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 등 모두 단색화 작가다).
“주춤하는 게 아니라 물건이 없는 거예요. 나만 해도 불이 나고 도둑맞고 해서 작품 수백 점이 사라진 거니까.”

그러면서 한국 사람은 남이 잘 되면 끌어내린다는 중국 장개석의 한국 사람론을 꺼내 단색화에 대한 시샘이 있는 거라는 시각을 드러냈다.

아흔을 바라보고 있는 작가는 자신의 화가 인생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보수 세력은 나를 혁신주의자라고 하고 좌파세력은 보수 꼴통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유일한 개혁주의자예요. 평생 나를 개혁한 사람입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