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이달 들어 각각 한국 영공과 북한 영해에 침범해 문제를 일으켰지만 모두 ‘침범한 게 아니다’며 침범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다. 러시아는 24일 러시아 군용기의 한국 영공 침범 사실을 부인한 데 이어 지난 17일 러시아 어선이 북한 영해에 들어가 나포된 것을 두고 ‘북한 영해에 들어간 게 아니니 나포는 불법’이라고 주장했다.
리아노보스티 통신은 러시아 수산청이 24일(현지시간) “(북한에 억류된) 어선 ‘샹 하이린(Xiang Hai Lin) 8호’는 한국 속초항을 출발해 항해하던 도중 북한 국경수비대 군함에 나포된 뒤 원산항으로 이송됐다”며 “형식상 원인은 (북한)보호구역 진입”이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우리는 (어선) 억류를 불법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국제법에 따르면 배타적경제수역(EEZ)을 통한 항행은 허용되기 때문”이라며 “수산청 감시시스템 자료에 따르면 어선은 (북한)해안에서 멀리 떨어져 북한 영해를 벗어난 곳을 항해 중이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이 같은 주장은 23일 오전 러시아 조기경보통제기가 독도 인근의 한국 영공을 침범한 것을 부인한 것과 비슷한 흐름을 보인다. 같은 날 러시아 국방부는 공보실 명의의 언론 보도문을 내고 “임무수행 과정에서 양국(러시아와 중국) 공군기들은 관련 국제법 규정들을 철저히 준수했다. 객관적(비행)통제 자료에 따르면 외국 영공 침범은 허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공중우주군 장거리 항공대 사령관인 세르게이 코빌랴슈 중장도 23일 타스통신에 “객관적(비행)통제 자료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 영공 침범은 허용되지 않았다. 분쟁 도서(독도)에 가장 가까이 근접한 군용기와 도서 간 거리는 25㎞였다”며 “한국 조종사들의 행동은 공중 난동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오히려 한국 공군의 차단 기동을 비난했다.
이에 우리 국방부는 24일 “러시아 측의 주장은 사실을 왜곡한 것일 뿐만 아니라 어제(23일) 외교 경로를 통해 밝힌 유감 표명과 정확한 조사 및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입장과 배치되는 주장”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어제 오전 러시아 A-50 조기경보통제기 1대가 독도 영공을 두 차례 침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우리 국방부는 이에 대한 명확한 근거자료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앞서 러시아 차석 무관은 23일 외교 경로를 통해 ‘기기 오작동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며 한국 영공 침범에 깊은 유감을 표했다고 윤도한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이 24일 전했다. 그러나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자국 군용기의 한국 영공 침범 사실을 인정한 바 없다”며 “러시아 측은 러시아 항공우주군 소속 군용기의 한국 영공 침범 사실을 확인하지 않았다”고 청와대의 발표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러시아는 한국 영해와 북한 공해에 대한 침범을 부인하면서 모두 ‘자국의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들어 한국과 북한의 대응이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러시아 어선 나포에 대한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직까지 나오지 않아 정확한 사실관계 확인은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객관적(비행)통제 자료’를 언급하며 한국 영공 침범 사실을 부인함으로써 한국 측에서 제시한 러시아 군용기의 침범경로 분석 자료는 틀렸다고 주장한 셈이 됐다.
한편 러시아 어선 나포와 관련해 북한이 우리 측의 공식서한과 연락사무소를 통한 구두접촉 모두에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는 상황에서 밝혀진 사실은 많지 않다. 그나마 북한은 러시아와는 소통하고 있어 러시아를 통한 사실 확인만 가능한 상태다.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관은 24일(현지시간) 자체 페이스북 계정에 글을 올리고 “북한 외무성 대표들에 따르면 선박은 ‘북한 영토 입국 및 체류 규정’ 위반으로 억류됐고, 현재 선박은 원산항에 있다”고 전했다. 선원들의 건강상태는 모두 건강하며 원산의 한 호텔에 머물고 있다.
한국과 북한, 러시아 모두 각자의 자료를 근거로 민감한 영공·영해 침범 사실을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침범 사실을 강력히 부인하고 있는 러시아 주장의 신빙성은 물음표다. 이와 관련해 모스크바 고위 외교소식통은 24일 연합뉴스에 “러시아가 설령 실제로 한국 영공을 침범했다 하더라도 이를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러시아뿐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영공 침범과 같은 민감한 사안을 인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