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국민의 신뢰와…” “사랑 받는 검찰로 거듭나기를…” 연달아 울컥하며 눈시울이 붉어졌다. 직원들이 잇따라 박수를 보냈다.
24일 전주지검 대회의실, 퇴임사를 읽어 내려가던 윤웅걸(53·사법연수원 21기) 전주지검장은 끝내 자신의 글을 다 읽지 못했다.
“부디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검찰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라는 구절이었다. 다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윤 지검장은 결국 신현성 1부장검사를 불러 대신 마무리를 부탁했다.
“남은 인생 대한민국 검사였음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겠습니다.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감사합니다.”
신 검사가 마지막 구절을 읽자 또 다시 박수가 쏟아졌다.
윤 지검장은 이날 24년간 생명과도 같이 여겨온 검찰 옷을 벗었다. 퇴임사는 지난 17일 사의를 표명하고 검찰 내부 통신망인 이프로스에 ‘검찰을 떠나며’라는 제목으로 올린 글이었다.
윤 검사장은 이날 가족과 직원들이 모인 퇴임식에서 1주일 전 올린 글을 읽어 내려갔다.
“지금까지 제가 검사로 살아오는 동안 많은 도움을 주신 검찰가족 여러분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검사의 인생은 끊임없는 판단과 결정, 그리고 번민의 연속이었습니다. 검사를 끝내는 이 시점에 서서, 저 자신이 그간 내린 모든 결정이 정의로웠는지, 꼭 그때 그러한 결정을 해야 했는지 반추해 봅니다. 권력이 있는 자와 없는 자에게 모두 공정하였는지,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 가혹한 적은 없었는지도 되돌아봅니다.”
윤 지검장은 “검찰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칼에 비유된다”며 “검찰이 칼이라면 사람을 죽이는 칼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칼이 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갈등의 심화가 아닌 치유의 결과로 국가와 사회를 살리는 칼이 되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환부만 정확하게 치료하는 명의(名醫)와 같이, 검찰권은 문제부분만 정밀하게 도려내는 방식으로 사회의 병리현상을 치료하는데 행사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는 북송시대 문인 소동파의 ‘인자함은 지나쳐도 군자로서 문제가 없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치면 잔인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인자함은 지나쳐도 되지만 정의로움이 지나쳐서는 안 된다’라는 글을 인용, “검사는 정의를 추구하되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은 잃지 않아야 한다”라고 해석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윤 지검장은 “저는 두 차례에 걸친 검찰개혁론을 통해, 검사는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직접수사 대신 수사지휘에 집중함으로써 ‘팔 없는 머리’로 돌아가자고 주장한 바 있다”며 이때 이에 공감한 후배 검사가 보내줬다는 정호승의 시 ‘부드러운 칼’을 인용하며 작별 인사를 갈무리했다.
“부드러운 칼을 먹고 물고기가 산란하듯, 추상과 같은 칼의 속성은 간직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애정은 잃지 않음으로써 부디 국민의 신뢰와 사랑을 받는 검찰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전남 해남 출신인 윤 지검장은 고려대 법대를 졸업하고 1995년 창원지검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했다. 수원지검 공안부장과 서울중앙지검 공안2부장·2차장 등 공안 분야 요직을 모두 거쳤다. 2015년 검사장으로 승진해 대검 기획조정부장과 제주지검장을 지내고 지난해 6월 전주에 부임했다.
그는 청와대가 지난 16일 윤석열 서울지검장(59·23기)에 대한 검찰총장 임명안을 재가하자 검사장급으로는 9번째로 사의를 표명했다. 그는 윤 총장의 연수원 두 기수 선배다.
윤 지검장은 퇴임을 하루 앞둔 23일 기자간담회를 갖고 “윤석열 신임 총장이 그동안 보여줬던 강직함이 꺾이지 않고 일을 한다면 국가와 검찰을 살리는 총장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어 검찰을 제대로 개혁하려면 “검사가 객관성을 상실할 수밖에 없는 직접 수사를 줄여야 한다”며 “대신 인권 침해를 줄이고 범죄 척결의 효율성을 도모할 수 있는 수사 지휘에 집중하고 이를 강화하는 게 진정한 개혁 방향이다”고 말했다.
“그동안 공직이라는 무게감은 참 대단했습니다. 그 짐을 벗고 그동안 소홀했던 가족(아내와 2남1녀)에게 행복을 줄 수 있도록 힘쓰면서 살겠습니다. 그리고 국가와 사회를 위해 또 다른 부분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보겠습니다.”
앞서 윤 지검장은 검경 수사권 조정안을 놓고 첨예한 목소리가 나올 때 지난해 11월과 지난달 두 차례에 걸쳐 검찰내부망에 ‘검찰개혁론’을 올렸다. 지난 달 국회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된 검경 수사권 조정안이 중국 공안 제도와 유사하다며 비판했다.
문무일 검찰총장의 대학 후배로 2년 전 문 총장 인사청문회 준비단장을 맡기도 했던 윤 지검장은 문 총장과 같은 날 검찰과의 인연을 마감했다.
이날 퇴임식에는 동기이자 동갑내기인 박균택 광주고검장이 참석해 축하 인사말을 했다. 윤 지검장의 퇴임사가 끝나자 한 직원이 정호승의 시 ‘부드러운 칼’을 낭독했다. 행사가 모두 끝나고 기념촬영에 이어 직원들과 악수를 나누는 동안 팝송 ‘You raise me up’이 식장에 울려 퍼졌다.
전주=글·사진 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