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신미의 존재 몰랐다… ‘나랏말싸미’ 역사 왜곡 논란

입력 2019-07-25 00:30 수정 2019-07-25 00:45
영화 '나랏말싸미' 스틸컷. 네이버무비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가 개봉과 동시에 ‘역사 왜곡 논란’에 휩싸였다. 일부 관객들은 영화가 조선왕조실록을 부정하며 세종대왕과 훈민정음을 모욕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나랏말싸미’는 세종의 한글 창제 과정을 함께했으나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불교 승려 신미대사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그가 한글을 만드는 데 크게 관여했다는 게 주된 내용이다.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신미의 역할이다. 영화 속에는 세종이 신하들의 오해를 받으면서도 신미의 주도 아래 한글 창제를 이어간다. 세종보다는 신미에 초점이 맞춰지는 구조로 한글 창제의 공을 신미에게 돌리려는 듯하다는 게 논란점이다. 또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한글을 만드는 과정에 신미가 등장하는 것 자체가 왜곡된 사실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와 관련된 조선왕조실록 기록은 다음과 같다.

문종 즉위년 경오(1450) 4월6일(기묘), 영의정 하연 등과 신미의 관직 제수와 영응대군의 거처 등을 의논하다.

임금이 영의정 하연, 좌의정 황보인, 우의정 남지, 좌찬성 박종우, 우찬성 김종서, 좌참찬 정분, 우참찬 정갑손을 불러 도승지 이사철에게 명령해 의논케 하기를, “대행왕(大行王: 세종대왕)께서 병인년(1446: 훈민정음 반포년도)부터 비로소 신미의 이름을 들으셨는데, 금년(1450)에는 효령대군의 사제(私第)로 옮겨 거처해 정근(精勤)할 때 불러 보시고 우대하신 것은 경들이 아는 바이다”.

이에 따르면 세종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인 1446년에서야 신미라는 이름을 알게 된다. 이는 아들 문종의 증언으로 그는 “세종이 신미를 처음 접견한 것은 효령대군의 사저로 거처를 옮긴 1450년”이라고 말했다. 신미의 이름은 실록에 총 66번 나온다. 처음 등장한 것은 세종 왕비 소헌왕후의 장례 기간인 1446년 5월 27일이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단독 창제한 해는 1443년이고, 세상을 떠난 해는 1450년이다. 따라서 신미가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거나 세종을 도왔다는 영화 속 설정은 모두 거짓이다.

영화는 ‘다양한 훈민정음 창제설 중 하나일 뿐’ ‘영화적으로 재구성한 영화일 뿐’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 같은 설을 영화화한 것은 청소년이나 외국인들이 사실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문지연 기자 jy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