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풍경 속으로…국립중앙박물관 실경산수의 폭포수 맛

입력 2019-07-23 15:42 수정 2019-07-23 21:25
‘와유(臥遊)’

조선 시대 선비들은 사랑방에 누워서도 그림 속 산수를 보며 자연에서 노니는 기분을 맛봤다. 금강산 가는 꼬불꼬불 산길을 말을 타고 오르고, 기암절벽 바다에서 뱃놀이하는 그림 속 유람객에 감정을 이입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가면 그런 와유 문화에 빠져볼 수 있겠다. 조선의 화가들이 전국의 명승지를 그린 그림이 그득해 폭포수 같은 시원함을 준다.
김홍도의 '해동명산도첩' 초본을 들여다보고 있는 관람객. 손영옥 기자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 시대 실경산수화’ 전에는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국내외에 소장된 실경산수화 360여점이 나왔다. 금강산 그림이 총출동한 적은 있지만, 개성 부산 부안 단양 등 전국 명승을 그린 실경산수(實景山水)가 모두 나오기는 처음이다.

실경산수 하면 뭐니 뭐니 해도 금강산이다.

“나는 꿈속에서 자주 산수를 노닐었다.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 후 8∼9년 동안 꿈에서 비로봉과 만폭동을 밟은 것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겸재 정선의 '신묘년풍악도첩' 속 '단발령망금강산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겸재 정선의 후원자였던 선비 김창흡은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을 보며 여행에의 유혹을 달랬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금강산 여행 광풍이 불었다. 금강산 그림의 최고봉인 정선의 ‘신묘년 풍악 도첩’ 속 ‘단발령 망 금강산도’가 길 안내를 하듯 전시장 초입에 걸려 있다.

새로움은 전시의 미덕이다. 풍속화의 대가로만 알았던 김홍도를 새롭게 만날 수 있다. 화원 화가 김홍도가 동료 김응환과 함께 정조의 명을 받아 1788년에 금강산과 강원도 일대를 그린 명품 산수화가 나왔기 때문이다. 김홍도는 ‘해동명산도첩’을, 김응환은 ‘해악전도첩’을 남겼다. 특히 김홍도의 ‘해동명산도첩’은 이른바 초본이다. 당시 화가들은 산수를 더 실제처럼 닮게 그리기 위해 현장에서 스케치했는데, 초본은 그 드로잉을 말한다. 굽이굽이 펼쳐놓은 화첩을 마주하면 강릉 경포대, 삼척 능파대 등 강원도 명승을 유람하는 기분에 흠씬 젖게 된다. 같은 장소를 그려도 화가마다 붓질이 달라 비교하는 재미도 있다. 휴대용 붓과 벼루, 먹 등 당시의 화구도 전시해 놓아 고갯마루에서 땀을 식힌 후 눈 앞에 펼쳐진 장관을 꼼꼼히 묘사하던 옛 화가들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김응환의 '해악전도첩' 속 '단발령'

조선 초에는 산수를 그려도 중국 그림에 나오는 중국 산하처럼 그렸다. 그런 관념 산수를 벗어나 실제 답사한 우리 산을 그리는 실경산수는 18세기에 절정을 이뤘다. 이인문 강세황 김윤겸 등 문인화가들이 전국 각지 명승을 그린 그림도 대거 나왔다. 강세황이 남긴 ‘송도기행첩’은 남북관계가 무르익기에 곧 실현될 것 같은 개성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려 놓는다.
조선시대 화가들이 실경을 그리기 위해 휴대했던 화구. 손영옥 기자

이번 전시는 실경산수화의 역사를 톺는다. 실경산수는 조선 초기 관료들 모임을 그린 계회도나 회화식 지도, 궁중 기록화에서 발원한다. 화원 화가 한시각은 1664년 함경도에서 시행된 문무과 별시 장면과 합격자 발표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길주과시’ ‘함흥방방(放榜)’을 그렸다. 그런데 한시각은 마침 함경도에 간 김에 일대 명승을 여행하며 별도로 실경산수화 ‘북관수창록’를 남겼기에 흥미롭다.
기증을 통해 일본에서 최근 돌아온 작자 미상의 '총석정도'(1577년). 실경산수가 18세기 절정을 이루었지만 이미 16세기에 이런 그림이 그려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이보다 앞선 16세기에 그려졌던 최초의 감상용 실경산수화 ‘경포대’와 ‘총석정도’도 볼 수 있다. 1577년 미상의 작가가 그린 이 두 점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재일교포 사업가 윤익성(1922∼1996) 씨의 유족으로부터 기증받아 처음 일반에 공개하는 것이다.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실경산수화 전통이 정선 이전부터 확립돼 있음을 보여준다”며 “한번 보는 인연도 맺기 힘든 그림”이라고 했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