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인천대 중국학술원 김판수
2017년 사드 사태로 인해 한중관계가 급속히 얼어붙자 경제사회적 교류도 급감했다. 그에 따른 ‘내성’이 생겨난 덕분인지, 현재 한일갈등에 대한 한국사회의 반응과 대응이 의외로 신속하고 침착한 것 같다.
약 2년 동안 우리가 중요한 교류국이라고 생각해왔던 중국·일본과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는 만큼, 한국사회는 이들로부터 탈피하여 ‘그 밖의 아시아 국가들과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중국·일본이 ‘힘’에 기반하여 한국과의 갈등을 고조시켰기 때문에, 우리 한국사회의 반응도 더욱 격렬해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들과의 정치적 관계가 회복된다고 할지라도 사회적 관계까지 회복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중국·일본과 ‘조금’ 멀어져 베트남·북한과 같은 이른바 낙후된 ‘공산권’ 국가들과의 교류 확대를 추진해야 한다면, 적어도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일은 피해야만 할 것 같다. 즉 1992년 한중수교 이후의 ‘중국 진출 문제’를 다시 한 번 성찰할 필요가 있다.
사실 한국의 중국 진출은 ‘중국의 필요’ 보다는 ‘한국의 필요’가 더 강했다. 1987년 6월 항쟁 및 1987년 10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노동 계급의 공세에 부딪혀 국가는 임금 현실화 및 폭력적 위계적 기업문화 개혁 요구에 직면했는데, 이에 노태우 정권은 노동에 대한 위로부터의 억압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고 또 임금까지 저렴한 ‘공산권’으로 눈을 돌려, 자본이 안정적으로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길을 찾아 주려했다. 특히 노태우 정부는 내부 통제가 잘 되고 있던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초기에는 중국보다 북한교류를 더 중시했지만, 북한 핵심험 문제로 인해 중국교류가 핵심 교류 국가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여전히 빈곤한 나라였기 때문에 양국 경제적 교류이 커질수록 사회적 갈등도 증폭되었다. 중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이 ‘경제적 힘’에 기반하여 중국인과 조선족 ‘노동자’에게 감시·욕설·폭력·성희롱 등을 일삼은 것은 그리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 때문에 한국 중소기업이 초기에 진출했던 중국 동북 지역 조선족들의 경우 한국인에 대한 반감이 지금도 매우 강하게 남아있다.
그 ‘후과’는 조선족들이 ‘부’를 축적하고 또 중국에서 한국인들의 경제적 권력보다 우위가 되었을 때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대표적 한인촌이었던 베이징의 왕징과 상하이의 홍췐루가 무늬만 ‘한인촌’으로 남았을 뿐 실제로는 중국인, 특히 조선족의 자본과 인력에 의해 잠식당한 것이다.
물론 중국의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베이징·상하이 한인촌이 과거와 같은 ‘영광’을 유지할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왕징과 홍췐루의 ‘쇠락’이 반드시 지금처럼 한국인들의 주변화 방향이 아니라, 한국인·조선족 또는 한국인·중국인 간의 사회적 협력 모델 구상 방향도 열려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사드 사태 이후 한국은 베트남, 북한, 그리고 러시아까지 중요한 사회경제적 교역국으로 인식하게 되었는데, 마침 한일갈등까지 장기화될 가능성이 높아져서 중국·일본 중심의 ‘아시아적 사고’는 더욱 약화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과거 한중 교류 실패에 대한 성찰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미국, 중국, 일본 등 ‘대국’들 사이에 낀 우리 한국이야 말로 폭력과 착취로 점철된 20세기와 달리, ‘새로운 21세기적 교류’를 찾아갈 필요가 있다.
인천=정창교 기자 jcgyo@kmib.co.kr
[차이나로그인] 사드 사태의 지속에 관한 성찰
입력 2019-07-23 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