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이란 핵합의(JCPOA·포괄적공동행동계획) 파기에 맞서 한 목소리를 내온 영국과 이란이 갈라설 위기에 놓였다. 이란은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던 영국 유조선을 기습적으로 나포해 억류했다. 이란은 해당 유조선이 어선을 들이받고 뺑소니를 쳤다고 주장했지만 영국 당국의 이란 유조선 억류에 대한 보복 조치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미국에 이어 영국까지 이란과 갈등을 빚으면서 중동 정세가 더욱 불투명해졌다는 우려가 나온다.
이란 혁명수비대는 지난 19일(현지시간) 호르무즈 해협에서 항해하던 영국 유조선 ‘스테나 임페로’를 나포했다. 고속정 수척이 유조선에 접근해 진로를 가로막은 뒤 특수부대원을 헬기로 투입해 배를 장악했다. 이란 국영방송은 21일 고속정이 유조선을 에워싸는 장면, 복면을 쓴 특수부대원이 헬기에서 유조선 갑판으로 밧줄을 내려 침투하는 장면 등을 공개했다. 혁명수비대는 당시 스테나 임페로 외에 다른 영국 유조선도 나포했다가 풀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이란 당국은 스테나 임페로가 어선을 들이받은 뒤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도주를 시도해 나포했다고 밝혔다. 또 스테나 임페로가 선박자동식별장치(AIS)를 끈 채 지정된 항로를 역주행하려 했다고도 주장했다. 이란 측은 충돌 사고를 일으킬 우려가 있다며 수차례 경고했지만 무시당했다는 것이다. 스테나 임페로는 20일 이란 남부 항구도시 반다르 아바스에 도착했다. 선원 23명은 선내에 머무르는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국제사회는 이란이 지국 유조선을 억류한 영국을 겨냥해 보복 행위를 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앞서 영국령 지브롤터는 지난 4일 시리아로 원유를 수송하던 이란 유조선 ‘그레이스 1호’를 억류한 바 있다. 이 유조선이 EU 제재 리스트에 오른 시리아 바니아스 정유공장에 원유를 제공하려는 것으로 의심됐다는 이유에서다. 이란은 직후 영국을 강하게 비난하며 대응 조치로서 호르무즈해협에서 영국 유조선을 나포하겠다고 위협해왔다.
영국은 스테나 임페로를 즉각 석방하라고 촉구했다. 제레미 헌트 영국 외교장관은 트위터에 “유조선 나포는 이란이 위험하고도 불법적인 길을 선택했음을 보여주는 우려스러운 징조”라며 “시리아로 향하던 이란 유조선을 억류한 지브롤터 당국의 조치는 합법적이었다”고 밝혔다. 헌트 장관은 “영국은 신중하고도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프랑스와 독일 등 다른 유럽연합(EU) 국가들 역시 이란의 나포 행위를 비난했다.
영국은 대응 조치로서 경제제재 카드를 검토하고 있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헌트 장관이 자산동결 등 외교·경제 조치들을 21일쯤 발표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JCPOA 타결 이후 해제된 EU의 대(對)이란 제재를 복원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다만 헌트 장관은 이란을 겨냥한 군사적 공격은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이란은 영국과 EU의 압박을 일축했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이란 외교장관은 트위터에 “지브롤터 당국의 해적 행위와 달리 우리가 페르시아만에서 취한 행동은 국제해양법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영국은 미국의 경제적 테러리즘에 더 이상 동참하지 말아야 한다”고 밝혔다. 일각에서는 영국과 이란이 외교 교섭을 통해 서로 억류한 유조선을 맞바꿀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