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군보다 인간… ‘나랏말싸미’ 송강호가 그려낸 세종대왕 [리뷰]

입력 2019-07-17 15:00
훈민정음 창제 이면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나랏말싸미’의 한 장면. 믿고 보는 배우 송강호가 세종대왕을 연기했는데, 판에 박힌 성군의 이미지에서 탈피해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을 담아냈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백성들을 살뜰히 아낀 어진 임금, 한글 창제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위인.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세종대왕’의 이미지는 이런 것이다. 그간 숱한 영화와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재연돼 오면서 하나의 ‘상’으로 굳어졌다. 그토록 결점 없는 군주의 모습은 어쩌면 국민적 바람이자 판타지였는지도 모르겠다.

오는 24일 개봉하는 영화 ‘나랏말싸미’(감독 조철현)가 보여주는 접근법은 사뭇 새롭다. 극 중 세종(송강호)은 우리와 다름없이 좌절하고 고뇌하는 평범한 인간으로 그려진다. 왕권 강화를 견제하는 유신들의 압박에 내내 시달리고, 가문이 역적으로 몰려 멸문지화 당한 아내 소헌왕후(고 전미선)의 상처조차 어루만져주지 못한다.

한글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는 그의 고뇌가 더욱 짙게 나타난다. 신하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기어이 자신의 신념을 붙들고 의지를 다잡는다. 소갈증과 안질 등 평생을 앓아 온 지병은 또 하나의 걸림돌이다. 그는 새 글자가 완성되기 전 자신이 실명할지 모른다는 조급함과 두려움에 시달리기도 한다.


세종의 이런 인간적 면모는 송강호라는 배우를 만나 극대화된다. 이를테면 전제 왕권을 쥔 임금에게서 권위의식을 완전히 지워낸다. 특출한 재능을 지닌 자라면 그 신분이 미천할지라도 기꺼이 먼저 손 내미는 호방함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현실감과 친근감, 입체성이 덧입혀진 인물이 완성되는 것이다.

개봉 전 취재진을 만난 송강호는 “각자의 머릿속에 ‘세종은 이러할 것’이라고 그려지는 바가 있을 것이다. 나는 배우로서 새로운 파괴를 꾀하고자 창의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연기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글 창제 과정에서 느낀 개인적 고뇌나 군주로서의 외로움에 초점을 맞췄다. 그런 점이 우리 영화의 차별점이 아닐까 싶다”고 덧붙였다.

“‘사도’(2015)에서 영조를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조도, 세종도 실제로 만나보지 못한 역사적 인물이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만든 이미지가 존재한다고 생각했죠. 그것을 깨뜨리고 새롭게 창조하는 게 배우의 의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보이지 않는 틀에 갇혀 있는 위대한 성군의 이미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차곡차곡 새롭게 만든다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시종 차분한 분위기의 극에서 송강호는 중심을 잡는 한편 흐름을 조율해낸다. 특유의 유머 섞인 연기톤으로 간혹 웃음을 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러나 천하의 송강호에게도 작품의 과도한 진중함은 다소 버거워 보인다. 예상 가능한 내용들이 별다른 극적 구조 없이 나열되다 보니 지루함을 주고 만다. 송강호의 연기도 이따금 ‘사도’와 겹쳐 보이는 부분이 있다.

영화는 세종이 독자적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했다는 학계 정설을 뒤집는 가설에서 출발한다. 여러 언어와 소리글자에 능한 신미대사(박해일)를 필두로 여러 중들이 힘을 모아 한글의 자모음을 구상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근거가 빈약한 설정은 작품 자체에 대한 몰입을 헤친다. 다만 세종의 애민 정신이 담뿍 담긴 대사들은 뭉클한 감동을 전한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