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내려도 당장 큰 변화 없을 듯”
돈이 잘 돌지 않는다. 미·중 무역분쟁에 이은 일본 수출규제 여파로 경제 주체들의 투자심리가 얼어붙고 있다. 경기 불확실성으로 주식 같은 위험자산에서 빠져 나온 돈은 은행에 쌓이고 있다. 안전자산으로 꼽히는 금·달러로 몰린다. 돈이 돌지 않으면 투자·소비 위축, 내수 둔화 같은 다양한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다. 기준금리 인하가 예고되고 있지만 ‘돈맥경화’를 풀 계기를 찾기 어렵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국은행은 올해 1분기 가계 및 비영리단체가 예금이나 보험, 주식, 채권 등으로 굴린 돈(자금운용)이 35조4000억원이라고 16일 밝혔다. 지난해 같은 기간(41조3000억원)보다 14.3% 줄어든 규모다. 가계의 경우 주식 및 펀드 운용 자금이 3조1000억원이나 줄었다. 지난해 1분기에 4조2000억원이 순유입됐던 것과 비교하면 썰물처럼 돈이 빠져나간 셈이다.
돈은 어디로 갔을까. 지난 5월 말 기준으로 국내 예금은행의 총예금 규모는 1430조원으로 집계됐다. 역대 최대치다. 저축성예금 같은 가계의 비결제성 예금은 더 크게 불었다. 잔액 기준으로 지난해 4분기보다 37조8200억원 증가했다. 지난해 늘어난 가계의 비결제성 예금(68조4580억원)의 절반이 넘는 돈이 올 1분기에 들어온 것이다.
한은은 “연초 코스피가 회복 장세를 보이자 개인들이 주식을 매도 처분한 영향과 은행간 예금 유치경쟁 때문에 가계의 비결제성 예금이 증가했다”고 분석했다. 여기에다 부동산시장이 안정세를 보이면서 갈 곳을 찾지 못한 돈이 은행으로 흘러 들어간 효과도 있다. 이렇게 쌓인 부동자금은 964조9800억원(지난 5월 기준)에 달한다. 1월(951조7500억원)보다 13조2300억원이나 증가했다. 저축성예금, 수시입출금예금, 머니마켓펀드(MMF),종합자산관리계좌(CMA) 등을 합친 금액이다.
은행으로 쏠리는 돈의 ‘고임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1분기 예금회전율은 3.5회로 직전 분기보다 0.2회 줄었다. 회전율이 낮아졌다는 건 예금을 맡겨 놓고 인출하지 않는 사례가 많아졌다는 의미다. 예금주가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요구불예금 회전율은 지난 5월 18.4로 4월(20.2)보다 1.8이나 떨어졌다. 가계와 기업이 돈을 인출해 쓸 곳을 찾지 못하다 보니 은행에 묵혀 두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금, 달러 같은 안전자산으로 뭉칫돈이 들어가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달 말 거주자(개인·기업)의 달러예금 잔액은 599억 달러(약 70조7100억원)에 이른다. 전월보다 42억5000만 달러(약 5조원)나 증가한 규모다. 또한 국민·KEB하나·농협은행은 올해 상반기에 324억원어치의 골드바(금괴)를 팔았다. 지난해 상반기와 비교해 91.5%나 증가한 수치다.
전문가들은 미래 경기의 불확실성이 높아지고 있어 부동자금이 위험자산으로 이동하기 쉽지 않다고 관측한다. 기준금리가 내려가더라도 예금에 묶은 돈을 인출하거나 대출을 받아 투자에 나설 가능성에 의문을 표시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기본적으로 투자 여건이 좋지 않는 상황에서 자금이 돌아가기 어렵다. 금리가 낮아져도 당장 눈에 띄는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박재찬 최지웅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