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그 특사 3인 가운데 이위종(1884~미상)은 독특한 인물이다. 한일병합에 항거해 1911년 1월 현지에서 자결한 이범진(1852~1911) 러시아 주재 특명전권공사의 둘째 아들로 젊은 나이에 국권 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고 이후 항일무장투쟁에 뛰어 들었다. 제정러시아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군 장교로 혁혁한 전공을 세우기도 했다.
명문 사대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해외에서 근대 교육을 통해 국제 감각을 익혔고 공사인 아버지와 함께 백악관을 방문해 미국 대통령 부부를 만나기도 했다. 러시아 귀족 여성과 결혼해 딸 셋을 둘 정도로 개방적인 국제주의자이기도 했다.
국운이 쇠락해 가던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해외에서 조국 독립을 갈구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갔지만 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지만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인물이다.
이준(1859~1907), 이상설(1870~1917)은 일찍부터 기념사업회가 조직돼 연구가 활발히 이뤄졌지만 이위종은 기념사업회는 말할 것도 없고 동상 하나 없다. 국내에 후손이 없고 30대 후반 나이에 갑자기 행방불명된 것이 이유일테지만 볼셰비키 혁명군에 가담한 이력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재야사학자 이승우(69)씨가 그런 이위종의 삶을 재구성한 역사소설 ‘시베리아의 별, 이위종’(김영사)을 펴냈다. 격동의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가 홀연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그의 일대기를 오롯이 담아낸 첫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출간에 앞서 지난 12일 만난 작가는 “열사를 다룬 몇 안 되는 국내 연구논문과 한국 러시아 일본 등에 흩어져 있는 외교문서 등 각종 문헌을 샅샅이 훑어 찾아낸 편린들을 당시 시대 상황과 엮어 그의 삶을 되살려 냈다”고 말했다. 지난해에 10월에는 러시아에 살고 있는 선생의 후손을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도 책에 실었다.
소설은 이범진 공사의 순국 자결 장면으로 시작되지만 대체로 이위종의 일생을 연대기 순으로 따라간다. 그는 해외 공사로 부임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열 두 살의 나이에 미국 땅을 밟았고 이어 프랑스 러시아로 이주해 서양 문물에 눈을 떴다. 근대 교육을 받게 된 과정, 프랑스의 생 시르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러시아 여성과의 결혼, 헤이그 특사 활동, 연해주 항일 무장투쟁 활동, 제정러시아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일, 붉은 군대 사령관으로 시베리아를 호령하다 일본 특무대에 체포돼 사살되기까지의 과정이 펼쳐진다.
특히 헤이그 특사로서 펼친 활약상은 인상 깊다. 그는 1907년 6월 헤이그 제2차 만국평화의 당시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공사관의 하급 외교관(참서관)으로, 정사(正使) 이상설을 보좌하는 부사(副使)였지만 발군의 활약을 펼쳤다. 프랑스어·영어·러시아어에 능통하고 서양 문화에도 익숙해 각국의 언론인들에게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알리고 국권 회복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는 데 앞장섰다.
그가 인터뷰한 기사는 만국평화회의 소식지인 ‘만국평화회의보’ 1면 상단에 헤이그 특사 3인의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됐다. 이를 계기로 마련된 언론인 클럽 강연에서도 그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1905년 을사조약이 무력을 앞세운 강압과 협박에 의한 것이었고 고종황제의 재가를 받지 않은 불법임을 논리정연하게 설명해 호평을 받았다. 책에는 뉴질랜드 국립도서관에서 찾아낸 당시 그의 연설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 영어 전문이 실려 있다.
일제가 그해 8월 궐석재판을 통해 무기징역형을 선고하는 바람에 고국행이 막혔지만 그는 꿋꿋하게 항일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간다. 헤이그에서 ‘오직 힘만이 정의이고 나라를 지킬 수 있는 것은 오직 힘뿐’이라는 걸 절감한 그는 무장독립투쟁으로 방향을 튼다. 아버지의 지시로 거액의 군자금을 들고 항일투쟁 근거지인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고,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등과 함께 항일의병 조직인 동의회를 결성해 회장으로 활동했다.
한일병합으로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러시아 혁명에 가담해 붉은군대(적군) 장교가 됐다.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침략을 비난하고 피압박 민족의 해방을 열렬히 지지하자 러시아 혁명의 성공이 조국 독립의 지름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위종은 생 시르 사관학교에서 배운 군사지식을 활용해 잇따라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려고 시베리아에 진주한 일본군을 상대로도 혁혁한 전과를 거둬 붉은군대 내에서 ‘시베리아의 별’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최근 공개된 일본 외무성의 기밀문서들은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가 이위종을 해외 한인 중 가장 위험한 인물로 점찍고 행적을 추적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책 내용의 80%는 사료를 근거로 한 팩트(사실)지만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10~20%는 픽션(허구)으로 살을 입혔다고 했다. 생 시르 사관학교 재학 대 일본인과 독일인 생도와의 인연,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당시 활동, 시베리아에서 일본 특무대에 납치·사살된 최후 장면 등이 그것이다.
작가는 “이위종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내고 책의 내용을 더 풍부하게 하기 위해 일부 픽션을 가미했지만 전혀 엉뚱한 내용은 아니다”며 “일부 장면들은 당시 정황으로 미뤄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설정”이라고 말했다. 안중근이 1909년 10월 하얼빈 역에서 침략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때 사용한 8연발 권총을 이위종이 전달한 것으로 설정했는데 그가 군자금으로 무기를 사들여 의병들에게 제공했고, 동의회에서 안중근과 함께 활동했기 때문에 사실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이위종을 한국 최초의 코스모폴리탄(세계인)이자 공화주의자·민본주의자였고, 무력에 의한 독립을 강조한 독립전쟁론자였으며 최고의 로맨티스트였다고 정의했다. 또 봉건과 근대, 서양과 동양, 약소국과 강대국의 경계에서 살았던 슬픈 경계인이라고도 했다. 삶의 스펙트럼이 워낙 넓어 그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뜻이리라.
작가는 “베일에 가려져 있던 이위종이란 영웅을 현재로 불러내 그의 불꽃같은 삶을 독자, 특히 청년들에게 알리고 싶었다”며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열사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누군가가 연구를 더 발전시켜 남아있는 역사의 공백을 메우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16일 서울 중구 환경재단에서 열린 출간 기자간담회에는 러시아에 살고 있는 열사의 외손녀 류드밀라 예피모바씨와 외증손녀 율리아 피스쿨로바씨가 자리를 함께 했다. 작가와 출판사의 초청으로 방한한 이들은 열사와 아내 엘리자베타 발레리아노브나 놀켄의 둘째 딸 니나의 후손이다. 열사의 후손은 이 둘을 포함해 5명이 생존해 있다.
라동철 논설위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