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한 중소기업 영업직 사원인 한모(40)씨에게 요즘 술자리가 부쩍 줄었다. 음주운전 기준과 처벌을 크게 강화한 ‘윤창호법’이 시행된 뒤로 새벽까지 이어지는 술자리는 가능한 피하게 된 것이다. 회사 측은 업무특성을 고려해 한씨에게 “술을 마신 다음날은 출근을 늦게 해도 된다”고 허락했지만, 그의 귀가시간은 예전보다 훨씬 빨라졌다. “저만 아니라 동료들도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는 걸 꺼리는 분위기에요. 술 마신 다음날도 차를 모는 대신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합니다.”
#강원도 춘천에 거주하는 이모(52)씨는 10일 오전 8시쯤 출근하기 위해 아파트 앞 도로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평소 출퇴근으로 이용하는 승용차는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둔 채 말이다. 전날 자정까지 술을 마셨다는 그는 “경찰이 아침에도 음주운전 단속을 철저하게 하니 엄청 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 서울 강남에서 여의도로 출퇴근하는 신모(44)씨는 오후 5시면 회사문을 나선다. 주차해둔 승용차를 몰아 퇴근하는 그는 “몇 분이라도 일찍 출발해야 올림픽대로 안 막힌다”며 서둘러 회사 주차장을 벗어났다. 취직한 이래 거의 평일 저녁은 회사 근처 식당에서 해결했던 습관도 이젠 아내가 차려주는 저녁상 받기로 바뀌었다.
#전남 순천에서 광양으로 출퇴근하는 박모(48)씨는 지난 9일 밤 9시쯤 광양의 한 식당에서 조용히 빠져나와 대리운전으로 귀가했다. 2차 술자리까지 갔다가는 다음날 승용차를 몰고 출근할 수 없을 것 같아 1차 회식도 마치는 둥 마는둥 하고 나온 것이다. 매일 승용차로 거래처를 돌아야 하는데 그는 “윤창호법이 무섭긴 무섭다”고 했다.
지난달 25일 ‘윤창호법’이 시행되면서 직장인들의 밤 문화가 바뀌고 있다. 술자리가 간소화해지고 귀가가 일러지고 있다. 늦은 밤까지 술자리가 길어질 땐 다음날 아침에도 승용차 대신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하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업무상 승용차가 필요한 직장인은 아침 출근길에도 대리운전을 이용하는 ‘신(新)출근’ 문화도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시행된 ‘주52시간 근로제’도 샐러리맨들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놓는 요소다. 빨라진 퇴근시간 덕분에 일찍 집으로 돌아가 ‘저녁이 있는 삶’을 즐기는 직장인이 다수로 바뀌고, 회사 근처에서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잔을 하는 ‘잔류파’가 소수가 돼 가고 있다.
길게 일하는 한국형 일문화 관행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그동안 오피스빌딩가에서 성업중이던 식당과 선술집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다. 매출이 뚝 떨어져 폐업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어서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에서 30년째 고깃집을 운영하는 김모(62)씨는 “지난달 말부터 갑자기 매출이 급감해 이유를 몰랐는데 손님들이 8시만 조금 넘으면 전부 빠져 나가더라”며 “그때서야 윤창호법의 위력을 실감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앞으로도 매출이 줄어들 게 뻔해 가게를 접어야할지 걱정이 태산”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직장인들이 ‘2차’로 찾는 호프집이나 포장마차, 선술집, 유흥허가를 내고 장사하는 노래방이나 술집들은 더 울상이다. 직장인들의 회식이 음식점이나 식당에서 행해지는 1차로 끝나는 추세라서다. 전남 순천의 한 아파트 상가에서 꼬치전문점을 운영하는 서모(47·여)씨는 “1년 전 수천만원 권리금을 주고 (가게를) 인수했는데 요즘은 하루 손님이 세 팀 정도에 불과하다”며 “이대로 가다가는 인건비도 못 건질 것 같다”고 했다.
윤창호법은 음주운전으로 인명 피해를 낸 운전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고, 음주운전 기준을 강화하는 내용 등을 담은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가법) 개정안’ 및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말한다. 운전면허 정지·취소 등에 관한 단속 기준을 강화해 음주운전의 면허정지 기준을 현행 혈중알코올농도수치 0.05% 이상에서 0.03% 이상으로, 면허취소 기준은 0.10% 이상에서 0.08% 이상으로 정했다. 종전 음주운전 3회 적발 시 면허취소가 됐던 것 역시 2회로 강화했다.
정반대로 대리운전 업계와 택시업계는 예상치 못한 호황을 누리고 있다. 늦게까지 술을 마신 사람들이 거의 ‘전용’으로 이용하던 대리운전이 이젠 초저녁 맥주 한잔 마신 손님, 아침 숙취 걱정에 승용차를 두고 나온 손님 등으로 이용객이 늘어났다. 특히 저녁 8시~10시 사이엔 대리운전기사와 택시를 잡기 힘들 정도로 이용객이 폭증한다.
출근시간에 맞춰 전날 대리업체에 미리 예약해 대리운전을 이용하거나 택시를 타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24시간 콜센터를 운영하는 대리운전업체도 증가하고 있다. 한 대리운전업체 관계자는 “이때까지 오후 4시쯤 영업을 시작했는데 이제는 출근시간대와 점심시간에 도 고객들이 찾는다“면서 ”간단한 음주를 하는 직장인들의 대리운전 요청이 늘어나 24시간 영업으로 전환했다”고 전했다.
기관과 기업들도 직원들에게 주의를 당부하는 등 점검에 나서는 모습이다. 음주 단속 기관인 전국의 각 지방경철청은 윤창호법 시행 후 일주일간 직원들을 대상으로 계도·홍보 캠페인을 실시했다. 지방경찰청과 각 경찰서 정문 앞에서 출근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음주감지도 실시했다. 직원들에게 술을 마신 다음날에는 꼭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를 당부했다.
순천·대구·울산·강원·청주=김영균 기자, 최일영 조원일 서승진 홍성헌 기자 ykk222@kmib.co.kr
순천=김영균 기자 ykk22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