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강화한 이유에 대해 “반도체 원재료가 독가스인 사린가스로 전용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사린가스는 일본인들에게 공포와 트라우마의 대상으로 통하는데, 정부가 이 트라우마까지 건드리며 수출규제를 합리화한 것이다.
일본 공영 NHK 방송은 9일 익명의 일본 정부 관계자를 인용하며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한 반도체의 원재료 등 수출규제를 엄격화한 배경에는 한국 측의 무역관리 체제가 불충분했기 때문”이라며 “이대로라면 화학무기 등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는 물자가 한국에서 다른 국가로 흘러들어갈 리스크를 배제할 수 없다”고 보도했다.
이어 “수출규제 대상이 된 소재는 화학무기인 사린가스 등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지만 일부 한국 기업이 발주처인 일본 기업에 서둘러 납품하도록 재촉하는 것이 상시화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일본 경제산업성은 관련 일본 기업 측에 개선책을 마련하라고 촉구했지만, 한국 당국은 무역관리체제가 미흡해 한국 기업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았다는 게 일본 관계자의 주장이다.
한국의 무역관리 체계가 허술해 일본에서 수출된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가 북한을 비롯한 타국으로 흘러들어가 사린가스 등의 화학무기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안보상의 위협’을 근거로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지난 7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참의원 선거 방송 토론에서 “한국은 (대북) 제재를 지키고 (북한에 대한) 무역 관리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징용공(강제징용) 문제에 대해서도 국제적인 약속을 지키지 않는 상황에서 무역 관리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9일(현지시간)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상품무역이사회 회의에서도 ‘안보 우려를 바탕으로 한 수출 통제’라는 주장을 폈다. 이에 한국은 같은 자리에서 일본의 조치에 대한 해명과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WTO 위반이라는 지적은 전혀 맞지 않으며 철회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답했다. 노가미 고타로(野上浩太郞) 관방부 부(副)장관은 10일 정례 브리핑에서 “WTO에서 인정되는 안보 목적의 수출관리 제도의 적절한 운용에 필요한 재검토”라고 말해 기존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한편 사린가스는 맹독성 신경가스로 1995년 일본 내 유사 종교단체인 옴진리교가 도쿄 지하철에 살포해 13명이 숨지고 6200여명의 부상자를 내는 데 사용됐다. 당시 출근길 직장인과 공무원들이 무차별 테러에 피해를 입어 일본열도 전체가 충격에 빠졌었다.
이 때문에 사린가스는 일본인들에게 아직도 공포와 트라우마의 대상으로 통한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 대한 수출규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자국민의 트라우마를 자극하는 요소까지 꺼내들며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