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규모 반(反)러시아 시위가 열린 조지아에서 TV 생방송 도중 진행자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양국 관계가 최악으로 악화됐다. 러시아 정부는 지난달 반러 시위와 관련해 예고한대로 8일(현지시간)부터 자국과 조지아를 잇는 직항 항공편을 금지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9일 조지아에 대한 러시아 의회의 추가 경제 제재 요구를 거부하면서 그 배경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유로뉴스 등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러시아와 조지아의 긴장관계를 완화하기 위해 지금 상황을 좀더 복잡하게 만드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조지아 국민을 존중해 나는 경제 제재를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예상치도 못했던 푸틴의 유화적 태도는 조지아에서 반(反)러 감정이 심각해질 경우 결과적으로 러시아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지아의 반러 감정은 뿌리 깊다. 옛 소련에서 독립한 조지아는 친서방 노선을 택하고 나토 가입을 추진했다. 하지만 조지아와 긴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러시아는 나토 가입을 방해하고 나섰다. 러시아가 조지아 내에서 분리독립 운동을 펴던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를 지원하면서 2008년 양국 간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결과 조지아는 전체 영토의 20%를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에게 내줬으며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러시아는 현재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지난달 러시아 하원의원 세르게이 가브릴로프의 조지아 방문은 반러 감정에 기름을 끼얹었다. 2008년 전쟁에 관여한 가브릴로프가 조지아 의회 의장석에서 러시아어로 연설한 것이 알려지면서 야권 주도의 대규모 반러 시위가 수일 간 지속됐다.
친러 성향의 집권여당 ‘조지아의 꿈’은 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해 왔다. 가브릴로프의 방문은 그 일환이었지만 친러 성향의 여권을 비판하는 대규모 시위만 일으켰다. 게다가 조지아 정부가 시위대를 강경진압해 최소 200여명이 부상당한 것도 여론을 악화시켰다. 특히 가브릴로프의 조지아 방문을 추진한 집권여당 대표 비지나 이바니슈빌리는 비판의 대상이 됐다.
시위대는 반러에서 나아가 강경 진압에 책임이 있는 내무장관 사퇴와 선거제도 개편까지 요구하고 나섰다. 결국 이바니슈빌리 대표는 선거개혁 추진을 약속했다. 그는 ”새 선거제도는 정당의 원내 진출에 필요한 득표율 하한선(현재 5%)을 없애 정당의 지지율이 더 정확하게 의회에 반영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잦아드는 듯 했던 조지아의 반러 시위는 유력 민영방송 ‘루스타비 2’의 주말 시사평론 프로그램 진행자 게오르기 가부니아가 갑자기 러시아어로 푸틴 대통령을 향해 “악취를 풍기는 점령자”라면서 “푸틴과 그의 노예들에게는 우리의 아름다운 땅에 설 자리가 없다”고 비난하면서 다시 확산 국면에 접어들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8일 “모욕을 용납하지 않겠다”며 “조지아 당국이 극단주의자를 제지하지 못하면서 러시아에 대한 공격이 급증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러시아 정부는 조지아의 대규모 반러 시위에 대한 대응으로 양국 간 항공운항의 전면 중단을 예고했다. 매년 100만명이 넘는 러시아 관광객이 조지아를 찾는 만큼 항공운항의 전면 중단은 조지아 관광산업에 큰 타격이다. 이런 상황에서 방송진행자 가부니아의 욕설까지 나오자 러시아 정부는 추가 제재를 예고했었다. 조지아의 주요 수출품인 와인 및 광천수에 대한 수입 금지가 발효될 가능성이 높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여기에 러시아 정계에선 조지아와의 모든 관계를 완전히 동결하라는 요구가 잇따랐다. 러시아 상원 국제문제위원회 제1부위원장 블라디미르 드좌바로프는 “가부니아는 푸틴 대통령만이 아니라 러시아 전체를 모욕했다”면서 “러시아 정부는 조지아에 금수 조치 등 강력한 제재를 가하고 러시아 수사기관이 가부니아를 형사입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의회는 8일 조지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의결하고 나섰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이 추가 경제 제재를 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악화된 양국 관계도 진정될 수 있을지 관심을 모은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조지아 방송진행자 가부니아의 발언에 대해서도 “굳이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그리고 가부니아를 형사입건하라는 러시아 정계의 요구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며 지도자로서 배포를 드러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