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의 남편 조기영 시인이 전한 고 대변인의 삶이 화제가 되고 있다. 한 남자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이며, 문재인 대통령의 생각을 매일 국민에게 전하는 ‘청와대의 얼굴’인 고 대변인의 숨가쁜 하루하루가 잘 녹아있다는 평가다.
조 시인은 지난 2일 자신의 블로그에 ‘어느 나무꾼의 꿈’이라는 글을 올리고 청와대 대변인으로 사는 아내의 삶을 전했다. 조 시인은 “대변인으로 두 달, 그녀는 전화기와 산다. 밤 10시는 기본, 12시가 넘어서도 수백 명의 기자가 끊임없이 전화를 한다”며 “아이들을 위해 오랜만에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앞에 선 시간에도 전화기는 끊임없이 그녀를 부른다”고 했다. 이어 “내 요린지 그녀 요린지 구분이 어렵게 전화벨은 식탁을 마구 흔든다”고 덧붙였다.
조 시인에 따르면 고 대변인의 기상 시간은 새벽 5시다. 부대변인 시절 새벽 4시에 일어나던 것과 비교하면 1시간 늦춰졌지만 여전히 가족과의 평범한 일상 생활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조 시인은 “가족과 저녁 식사는 예정에 없다. (아내가) 그날 안에 제정신으로 들어오면 고맙다”며 “아이들도, 나도 기다리다 잠든 뒤 들어올 때도 많다”고 했다.
조 시인은 글에서 “아내의 건강이 염려된다”고 적었다. 조 시인은 “문 대통령의 이가 10개나 빠졌다는 이야기가 실감나게 다가왔다”며 “얼마 전 일찍 들어온 아내가 잇몸이 이상하다며 치과 이야기를 꺼냈다. 잊고 있던 틀니의 공포가 되살아났다”고 회상했다.
이 뿐 아니라 눈도 걱정이다. 조 시인은 “아내는 자료를 보고, 뉴스 모니터를 하고, 카카오톡을 확인하고, 뉴스를 검색한다. 방송을 위해 두번이나 눈 수술을 했던 그녀가 다시 안경을 쓴 모습을 보고 마음이 시렸다”며 “‘안 보이면 내 것(눈)과 바꿔줄까’라는 말 밖에 해줄 게 없었다”고 했다.
조 시인은 아내가 청와대의 입으로 살기 위해 들였던 시간과 노력을 강조했다. 조 시인에 따르면 고 대변인은 대선 캠프시절 문재인 후보의 승리를 위해 기여할 방안을 찾으러 몸으로 뛰었다.
2017년 4월 서울 광진구 어린이대공원 유세 현장이 좋은 예다. 고 대변인은 당시 선거 홍보 트럭에 올라 “KBS를 그만두고 이곳에 와 있다. 그렇게 결정하자 어머니, 아버지 세대들이 하나같이 그 좋은 회사를 그만두고 거기를 갔느냐고 했다”고 했다. 이어 “제 통장엔 출금만 있고 입금은 없다. 나는 시인 남편하고 살고 있다. 아이 둘을 데리고 있다”라며 “월급도 받지 않아 가면서 온 이유는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절박감 때문”이라며 캠프 합류 이유를 밝혔다.
고 대변인은 그러면서 “내가 가진 것은 많지 않고 물려줄 재산도 없다. 내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건 오로지 이 세상밖에 없더라”고 토로했다. 이어 “우리 아이들이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세상, 흙수저·금수저 이런 단어 따위 상관하지 않고 살아도 되는 세상, 기회가 공정하고 누구나 능력만큼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꿈꾸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고 대변인의 유세 영상은 조회수 100만을 넘긴 상태다.
청와대에 입성한 후에도 고 대변인은 바닥부터 뛰었다는 게 조 시인의 설명이다. 조 시인은 “아내는 대통령 행사 사회를 직접 챙겼다. 부대변인이 할 일이 아니라는 내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며 “다만 문 대통령을 위해 자신이 잘 할수 있는 일을 하자는 아내는 개의치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러면서 고 대변인과 문 대통령을 각각 허준과 유의태에 비유했다.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스승과 그를 따르는 제자라는 것이다.
마음은 굴뚝 같되, 청와대 생활은 쉽지 않았다. 조 시인은 “뉴스를 보던 고 대변인이 토할 것 같다며 화장실로 달려가던 날을, 자다가 일어나 캄캄한 방에서 카톡을 확인하던 아내를 기억한다”며 “아내는 실력이 없어 내려왔다는 말이 싫은 듯 그 시간을 견뎠다”고 회상했다. 일에 치이며 사람이 익숙해지고 일들이 몸에 붙으면서 고 대변인이 평균 이상의 능력에 도달했다는 게 조 시인의 설명이다. 그는 “서둘러 내려오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내려올 수도 없었던 시간이었다. 이 정도면 좌절은 아니니 언제든 홀가분하게 내려와도 된다고 생각할 즈음 그녀의 대변인 임명 소식이 들려왔다”고 했다.
조 시인은 고 대변인을 응원하면서도 한편으론 언젠가는 아내가 힘든 짐을 내려놓았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밝혔다. 조 시인은 “전화벨의 압박도, 공직자로 느끼는 부담도, 정치라는 복잡한 함수도 없는 곳에서 아내가 훨훨 날아가보고 싶다”며 “아이가 아직 둘뿐이니 우리 함께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롭게”라고 글을 마쳤다. 앞서 조 시인은 2017년 대선을 앞두고 고 대변인이 문재인 캠프에 합류하자 블로그에 ‘당신을 문재인에게 보내며’라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고 대변인은 경희대 재학 시절 조 시인을 처음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학창시절 동아리 회장을 맡고 있던 고 대변인은 우연찮게 조기영 시인과 연락이 닿으면서 가까워졌다. 두 사람의 나이 차는 11살이었다. 조 시인이 강직성 척추염이란 희귀병을 앓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조기영 시인 블로그 글 전문]
이럴 수가. 그녀에게 남...편이 새로 생겼다. 그 치는 겁도 없이 밤 12시 넘어서도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잠결에도 그녀는 그 치를 받으려 침대에서 부스스 일어났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받지 마~~~!
대변인으로 두 달... 그녀는 전화기와 산다. 예상은 했지만 밤 10시는 기본, 12시 넘어서도 어디선가 그녀를 찾는 전화벨이 울린다. 수백 명의 기자, 그들에겐 한 통이 그녀에겐 수백 통. 사안마다 수십 통은 기본. 아이들을 위해 오랜만에 앞치마를 두르고 싱크대 앞에 선 시간에도 전화기는 끊임없이 그녀를 부른다. 음식 요리라 했지 성대 요리라 했나... 내 요린지 그녀 요린지 구분이 어렵게 전화벨은 식탁을 마구 흔든다.
그럼에도 그녀는 일을 즐기는 듯하다. 파란집 입성 2년만에 회의를 주재하고, 자기 부서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며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리라. 부대변인 23개월 동안 그녀는 행사 사회 외에는 대외적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여사님을 모실 때도, 대변인을 보좌할 때도 모시는 분보다 도드라져 보이지 않으려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대변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 카메라 앞에서는 이니 옆이나 뒤에 서 있는 것을 피한다. 주인공은 모시고 간 그분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브이아이피가 등장하면 정치인들은 대개 그 옆이나 뒤쪽으로 자리를 잡는다. 카메라에 잡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수행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가만히 자리하고 있어도 되는 곳을 그녀가 굳이 피해온 건 다른 차원의 일. 주인공은 모시고 간 그분이어야 한다는 생각과 나도 주인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 생각의 차이가 행동의 차이를 만든다.
대선 캠프 시절, 그녀는 우아하게 앉아 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라 하면 뭔가 도우러 왔는데 가만히 있으라니 이해를 하지 못했다. 조그맣게라도 기여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고, 조치가 없으면 행동에 나섰다. 그 중 하나가 어린이대공원 부근 트럭 유세였다. 조회수 백만을 넘겼다.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한 건 파란집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 행사 사회는 그녀가 직접 챙기고 나선 일 중 하나였다. 캠프 시절과 마찬가지로 탁현민은 그녀를 큰일로 빛나게 해주려는 마음이 커 여러 이유를 들어가며 만류하곤 했다. 부대변인이 할 일이 아니라는 내부 의견도 만만찮았다. 사람 살아가는 세상에 최초란 바람을 가장 많이 맞는 존재... 이니를 위해 할 일을 하면 그뿐, 잘할 수 있는 일이었기에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어느 자리든 대통령의 국정 철학과 정책 방향, 생각들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녀는 행사 문구 수정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외부에서 온 진행자들은 문구를 바꾸기가 조심스럽다. 문구를 바꿨다 곤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하다면 별 수 없겠지만 가능하다면 해야 하는 것... 한없이 건조에 가까운 진행도 고심을 거듭하다보면 차원이 달라진다. 저 파란집에 그것을 유일하게 알아봐주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니. 소설 <동의보감>에는 허준과 스승 유의태가 첫 대면하는 장면이 나온다. 다른 제자와 함께 처음 캐온 약초를 유의태 앞에 내놓은 허준. 실뿌리까지 온전한, 정성이 보이는 허준의 약초와 대충 캐온 기존 제자의 약초. 그리고 뿌리에 가닿는 스승의 같은 눈동자, 다른 눈빛... 풀뿌리 하나로 사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스승이라면 삶이 고달파도 살아갈 힘이 된다. 그녀라고 다를 것 있겠는가.
새벽 4시. 2년 전 부대변인 직무를 시작할 때 그녀의 기상 시간이었다. 그때 그녀도 직감했을 것이다. 내가 어딜 들어온 거야... 직급이 높아진 덕분인지 요즘은 새벽 5시쯤 일어난다. 귀가 시간? 가족과 저녁 식사? 그런 건 예정에 없다. 그날 안에 제정신으로 들어오면 고맙습니다... 밤은 길고 귀가 시간은 다양하다. 밤 10시, 11시, 12시, 1시, 가끔 8시. 복권 당첨 7시. 아이들도, 나도 기다리다 잠든 뒤 들어올 때도 많다. 그리고 새벽이면 일어나야 한다. 등을 끌어당기는 잠의 중력을 끊고.
1년이 지나며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니 이가 10개나 빠져 틀니를 했다는 얘기가 실감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마흔도 안 된 그녀에게 틀니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얼마 전 웬일로 일찍 들어온, 그래봐야 8시 반, 그녀가 아무래도 잇몸이 좀 이상하다며 치과 얘기를 꺼냈다. 순간 잊고 있던 틀니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하지만 차마 공포 끝으로 솟은 걱정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이니의 남은 임기 대략 34개월, 그녀의 치아는 무사히 그곳을 탈출할 수 있을까.
이미 두 번의 눈수술 경력이 있는 그녀(쌍꺼풀 수술이 아니다. 그녀의 쌍꺼풀은 자연산이다)는 지난해 다시 안경을 맞췄다. 그녀가 파란집에서 외교부 장관을 맞이하는 사진이 포털에 뜬 적이 있는데 그 사진 속 안경이다. 사진 속 그녀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방송을 위해 두 번이나 눈수술을 감행했던 그녀가 다시 안경을 쓴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이 시렸다. 그래도 틀니는 아니잖아, 되지도 않을 위로를 했다. 이도 이지만 역시 그녀의 신체적 약점은 눈. 그 눈으로 자료를 보고, 뉴스를 모니터 하고, 카톡들을 확인하고, 뉴스를 검색한다. 무한 출몰하는 자료로 드러누운 활자와의 사투. 한국 언론사의 거의 모든 정치, 경제, 사회 뉴스를 들여다봐야 하는 운명의 눈에 현실적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보니 겨우 한다는 말이,
내 거가 이제 노안이긴 한데 시력은 괜찮아. 안 보이면 바꿔줄까?
2년 가까운 그녀의 부대변인 생활은 일터에서 자료 보다 뉴스 보고, 뉴스 보다 카톡 보고, 카톡 보다 종이 자료 보고, 온라인과 종이 자료 다듬어 자료 만들고, 집에서 다시 카톡 보고, 뉴스 보고, 카톡 날리던 날들의 연속이었다.
직무라는 동굴에서 마늘 같은 뉴스를 눈으로 먹던 그녀가 토할 것 같다며 화장실로 달려가던 날들을 기억한다. 아름다운 글들을 좀 읽고 싶다 토로하던 그녀를 기억한다. 자다가 캄캄한 방에서 카톡을 확인하던 그녀를 기억한다. 시대의 동굴 스마트폰 속에서 마늘 같은 문자를 꺼내먹는 곰의 시간이 길게 이어졌다.
그녀는 실력이 없어 내려왔다는 말이 구역질보다 싫은 듯 그 시간을 견뎠다. 일천한 정치 경력이 직무 수행에 장애로 느껴지는 날에는 내게 셋째 낳을까를 물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빠져나가는 건 그 방법뿐인 것 같다며... 그러면 나는 영화 <밀정>에서 본 ‘나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나조차 믿을 수가 없다. 다만 내가 해야할 일을 믿는다’던 김원봉의 대사를 읊조려주곤 했다. 그러면 그녀는 그분 당대표 시절 모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겠지,를 되뇌였다. 높기만한 대의, 깃털처럼 가벼운 억측과 편견, 오해에 오기와 구역질이 범벅이던 날들. 정치라는 진흙탕으로 걸어들어온 고귀한 인간, 이니를 위해 행여 자신이 좌절하면 안 될 것 같았던 시간들, 그 시간들 사이로 가끔씩 심심한 조미료나 뿌려주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거 뭐 장금이가 따로 없구만, 장금이네, 장금이! 대장금!
그녀는 희미하게 웃었다.
낯선 언어, 날선 공방에 비해 순화되고 정제된 언어에 익숙했던 그녀. 낯선 환경에 연착륙은 쉽지 않았다. 잘 포장된 도로 같지만 동시에 자갈밭인, 잘 가꿔진 정원 같지만 동시에 정글인 그곳... 일에 치이며 수북히 쌓이던 시간, 사람이 익숙해지고, 대중적 언어가 정치적 언어와 결합하고, 일들이 몸에 붙으면서 그녀는 어느 순간 일천한 정치 경력을 훌쩍 뛰어넘어 평균 이상의 능력에 도달해 있었다. 서둘러 내려오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내려올 수도 없었던 시간, 이 정도면 좌절은 아니니 언제든 홀가분하게 내려와도 된다고 생각할 즈음 그녀의 대변인 임명 소식이 들려왔다.
언젠가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나온 설훈 의원은 대선 출마 생각은 없느냐는 공장장의 질문에 대뜸 이렇게 말했다.
아니, 내가 왜 감옥에 들어갑니까.
그래, 파란집은 감옥이지. 외롭고 높고 쓸쓸한 감옥... 그 생각에 동의했다. 권력의 심장부란 잘하려 들면 감옥 같고, 누리려 들면 천국 같은 곳... 파란집은 이상을 꿈꾸는 청백리에겐 창살 없는 감옥이요, 타락한 악마에겐 사실상 놀이터... 높은 곳이란 그만큼의 높은 위험을 안고 살아가는 자리. 화려한 삶이란 그만큼의 넓이에서 생산되는 눈물을 베개로 베고 자는 게 일. 인간에게 위험이 없거나 눈물 없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위험을 최소화하고, 눈물을 줄이며 사는 방법들이 있을 뿐이다. 내가 아는 한 삶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똑바로 사는 것이요, 눈물을 최소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똑바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아는 정의이며, 집에 들어앉아 있는 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정의의 내용이라 믿는다.
나는 오래 전 선녀의 옷을 훔친 나무꾼... 그녀를 사랑한 벌(?)로 꽤 오래 독박육아 중이다. 그녀는 거의 매일 묻는다. 괜찮냐고... 괜찮다고 해도 다음날 표정이 안 좋으면 또 묻는다. 사실 아들 녀석과 금방 싸워 표정이 좋지 않은 것인데 하필 그때 들어와서는 자기 늦은 것 때문에 화난 줄 알고 불안한 표정으로 다시 묻곤 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설명해주니 요즘은 들어오며 분위기 싸하면 웃으며 ‘또 싸웠어?’ 한다.
그녀는 돌아다니는 걸 좋아한다. 여행도 즐긴다. 집에 있으면 병난다. 반대로 나는 집에 있는 걸 좋아한다. 글쓰는 사람은 여행 등으로 많은 경험을 해야한다고들 하지만 그것 또한 내 보기에 편견이다. 나는 하루 생활이 온통 집투성이인 인간. 이 집투성이 인간의 상식으로 그녀의 일터가 감옥이면 이 집도, 내 마음도 사실상 감옥... 하루빨리 이 자발적 감옥에서 벗어나 전화벨의 압박도, 공직자로 느끼는 부담도, 정치라는 복잡한 함수도 없는 곳에서 사랑스런 그녀와 무중력으로 어디든 훨훨 날아가보고 싶다. 아이가 아직 둘뿐이니 우리 함께 가볍게 날아오를 수 있지 않을까. 자유롭게.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