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말기 제주도에 일본군 위안소 있었다” 증언 나와

입력 2019-07-08 14:44
8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사무소에서 열린 '일제 강점기 성산리 일본군 위안소 공개 기자회견'에서 오시종 할아버지(왼쪽)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오른쪽은 조성윤 제주대 평화연구소장.

일제시대 말기 제주도에 일본군 위안소가 존재했다는 증언이 처음 나왔다.

제주대학교 평화연구소와 성산리는 8일 서귀포시 성산리사무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제시대 제주도 성산 지역에 위안소가 존재했다는 내용을 담은 제주대 조성윤·고성만 교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들이 발표한 논문의 제목은 ‘태평양 전쟁 말기 요카렌(予科練)의 제주도 주둔과 위안소-성산 지역을 중심으로’이다. 요카렌은 구 일본 해군의 소년 항공 요원 지망생이다.

논문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일본 해군은 미군의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일명 자폭 특공대인 신요대 3개 부대를 제주도에 전략 배치했다. 모두 진해경비부 소속으로 제45신요대는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 일출봉, 제119신요대는 서귀포시 서홍동 삼매봉, 제120신요대는 제주시 한경면 고산 수월봉 해안에 배치됐다.

이중 제45신요대 병사는 모두 요카렌 출신으로 16세부터 20세 전후의 청년으로 구성됐다. 요카렌은 구 일본 해군의 소년 항공 요원 지망생이다. 이들은 매일 자폭용 병기인 신요 보트에 올라 성산 일출봉 일대 해안에서 훈련을 받으며, 최전선에서 미군 함정에 돌격할 준비를 했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성산읍 주민 오시종(90)씨가 나와 당시 위안소 장소와 요카렌의 행태를 증언했다.

1945년에 15살이었던 오씨는 “성산 지역에서 운용됐던 위안소는 두 곳”이었다며 “한 곳은 당시 내가 살던 집에서 30m도 떨어지지 않은 ‘ㄱ‘자로 된 일반 민가(위안소1·성산리 143-10번지)를 개조해 사용했고, 다른 한 곳은 나카무라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여관에 딸린 초가집(위안소2·성산리 139-2번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위안소는 밖에서는 안을 볼 수 없게끔 막았다. 각각 5∼7명의 여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성산리 사람은 아니었다”며 “당시 성산에 주둔했던 육·해군 가운데서도 오직 요카렌만이 유일하게 위안소를 이용했다”고 말했다.



두 교수는 같은 시기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에 주둔했던 제120신요대의 정대장 무라카미 츠키오가 남긴 기록도 성산에서 운용됐던 위안소와 오씨의 기억을 이해하는 데 시사점을 준다고 말했다.

무라카미 츠키오는 “도내 다른 부대(제45·119)의 기지와 주변 민가의 상황과 비교할 때, 매우 열악했기 때문에 탑승원을 비롯한 부대원이 여가를 보낼만한 곳이 없어서 불쌍하기도 했었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성만 교수는 “무라카미 츠키오가 남긴 기록 중 ‘여가’라는 말이 위안소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직접 위안소, 위안부라고 명명하지 않았던 일제의 특성상 당시 위안소가 운영됐는지 퍼즐을 맞추는 열쇠는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조성윤 교수는 “2010년부터 목격자 인터뷰와 성산리 현지조사, 일본 측 사료를 교차 분석해 왔다”며 “연구를 하면서 만난 성산 주민 6명 중 위안소의 상황을 목격하고 그곳의 여성을 직접 만난 것은 오시종씨가 유일하지만, 그의 증언은 수차례의 인터뷰와 현지 조사, 그리고 일본 측 자료를 교차 분석한 결과 충분히 믿을 만하다고 판단된다”고 말했다.

다만 두 교수는 정황상 성산읍에 위안소가 설치·운영됐을 것으로 추정될 뿐 이를 확정하기에는 아직 남겨진 과제가 많다고 덧붙였다.

조 교수는 “다만 식민자의 기억과 피식민자의 기록 사이에 심한 불균형이 존재하고 있다. 앞으로 부족함을 메울 더 많은 증언과 관련 연구가 필요하다”며 “이번 연구 발표가 제주뿐 아니라 국내 위안소 연구를 촉진하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남중 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