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미술 거리를 걷다]5. 개항장에 서화 점포가 들어서다

입력 2019-07-07 06:00
서양인의 미술품 구매가 일어난 장소는 주로 개항장이나 서울‧평양 등 대도시였다. 외국 선박이 정박해 서양인이 집중 출몰하는 개항장은 미술품의 거래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나는 공간이었다. 서양인 고객들의 작품 구입 장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김준근의 경우, 개항장이었던 부산(초량), 원산, 인천(제물포) 등지를 이동하며 그림을 제작해 판매했다. 그는 장돌뱅이처럼 서양인 고객을 찾아 개항장을 옮겨 다녔던 개항기가 낳은 인기 화가였던 것이다.
개항기 서양기에 인기가 있었던 기산 김준근의 그림. 한국의 풍속을 보여주는 이런 종류의 풍속화가 서양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개항장에는 골동품이나 서화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점포도 들어섰다. 부산‧원산에 비해 늦은 1883년 개항한 인천은 일본인들이 상권을 장악한 개항장이었는데, 1893년 인천 거류 일본인 영업표를 보면 고물상이 2곳, 표구점이 1곳 있었다. 고물(古物)은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고려청자 등 고분에서 출토된 골동품을 뜻하는 용어로도 쓰였다. 또 서화를 표구해주고 판매도 하였을 표구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점포를 차려 이익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서양인의 그림 수요가 많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상설 점포를 차려 골동품이나 서화를 판매하는 것은 인천처럼 외국인 수요가 집중된 지역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특수한 경우로 보인다. 보다 보편적인 유통 방식은 1대 1 거래였다. 귀신을 몰아내고(辟邪) 집안을 꾸밀 목적으로 한국 가정에서 즐겨 붙이는 민화류는 외국인도 시전에서 구입하였다. 그러나 ‘수출화’ 성격을 띤 민속적 풍속화는 서양인 고객이 화가를 수소문해 제작을 의뢰하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이렇게 구입한 그림은 한국 관련 정보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주니한국을 소개하는 서양인의 저서에 수록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1884년에서 1885년까지 18개월 동안 조선을 여행하였던 W. R. 칼스의 《조선 풍물지》, 1891년 조선을 여행한 캐븐디쉬A. E. J. Cavendish의 《한국과 신령한 설산Korea and the Sacred White Mountain》, 1888년 10월 10일부터 한 달여 동안 서울에서 부산까지를 여행한 프랑스 민속학자 샤를 루이 바라Charles Louis Varat(1842~1893)의 여행 기록에 김준근으로 추정되는 화가의 그림이 실려 있다. 특히 융커Heinrich F. J. Junker의 저서인 《기산, 한국의 옛 그림》에 실린 김준근의 삽화는 묄렌도르프의 소장품이며, 컬린Stewart Gulin(1858~1929) 의 저서 《한국의 놀이Korean Games》에 실린 그림은 “미 해군제독 슈펠트Robert Wilson Shufeldt의 딸인 메어리 슈펠트의 주문을 받아 당시 부산 뒤편 초량에 살던 김준근이라는 화가가 1886년에 그린 것”이라고 서문에 적혀 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풍속화는 서양인의 목적과 시선에 맞춰 직업화가들이 다양한 형식으로 개발했을 뿐 아니라 제작 방식에서도 혁신을 이루었다. 김준근의 그림의 경우, ‘기산箕山’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는데 10여 년 간 1,200여 점이 제작된 것으로 확인이 된다. 생산량이 방대하고 작품의 기량에서 차이를 보인다는 점에서 위작이라기보다는 김준근이 직간접적으로 제작에 관여해 대량 생산에 응하는 방식을 취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공방 형식의 생산체제가 가동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연구자 신선영에 따르면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소장품을 포함한 김준근의 작품을 보았을 때 2명 이상의 필치가 보인다. 기산의 작품은 얼굴의 무표정과 도식성 탓에 작품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대량 주문에 응하기 위해 예술성의 연마보다는 도식화를 통해 쉽게 양산하고자 하는 상업적인 고려가 작용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고려청자 역시 1대 1 거래가 보편적이었다. 한국인 상인의 사례는 아니지만 이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경험담이 있다. 1927년 조선전매연초유통회사를 세워 사장으로 취임한 타카기 토쿠야高木德彌는 17세인 1895년 무일푼으로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이다. 이주 초기 말이 통하지 않는 조선 경성에 와서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것은 노상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고려자기와 옛 기물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그는 개항장에 정박한 외국 군함에까지 승선해 고려자기 등 한국의 옛 유물을 판매하였다.

서울거리에서 도자기를 흥정하는 서양인. 더 그래픽지 1909년 12월 4일자.

외국 신문도 이를 뒷받침해주는 조선 관련 삽화를 실었다. 영국 런던에서 발행된 주간 화보 신문 《더 그래픽The Graphic》 1909년 12월 4일 자에는 거리에서 한국인 거간과 흥정하는 서양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외국인에게 한국의 특색 있는 장면으로 포착이 될 정도로 당시에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거리 풍경이었음을 말해준다.

1대 1 거래가 가능한 것은 외부적으로 존재감이 두드러진 수집가가 고려자기를 사고자 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정보를 공유하는 중개상들이 경쟁적으로 찾아오는 거래 메커니즘이 작동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도 중국의 고대 서화나 골동품의 값비싼 미술품의 경우 거간들이 이를 살 만한 명문가를 찾아가는 형식이 많았던 것과 비슷하다. 21세기인 지금도 고가의 희귀 고미술품은 딜러들이 컬렉터에게 개인적으로 의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개항기에 고려자기가 거간을 통해 매매된 것은 거래 자체가 불법행위인 데서 연유한 측면도 있다. 당시 고려청자나 삼국시대 토기는 가정에서 향유되는 골동품이 아니었다. 무덤 속에 부장품으로 묻혀 있던 것이라 조선의 골동상점에서는 거래되지 않는 물건이었다. 이때는 골동품 하면 중국에서 건너온 고대 종정류(제의에 쓰던 청동으로 만든 종이나 솥)나 송대 자기나 명·청 시대 연적 등이 값나가는 것이었다.

고려자기는 개항기에 와서야 외교관이나 여행자 등 외국인들이 처음으로 그 상품적 가치나 예술적 가치를 발견했다. 이에 따라 수익을 노려 무덤에서 파내져 거래되기까지 이르렀다. 고고학 연구를 하러 1884년 조선을 찾았던 영국인 고랜드의 사례는 서양인 상대 출토품 거래가 불법성을 띤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부산 일대에서 구한 암회색 고대 토기에 대해 김해에서 난 것으로 한국인들이 불법 도굴한 것으로 보이며 부산의 일본인 정착민에게 가져다주었다고 전한다. 무덤 속 고대 자기와 토기가 팔아서 이익을 남길 수 있는 물건이라는 인식이 일본인을 통해 조선인에게 전이된 것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일본인의 사주로 한국인이 고려 고분 도굴에 가담하다 적발된 사실이 신문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독립신문》 1896년 12월 31일 자를 보자. “십이월 이십사일 장단군 서리 파주 군수 이종호 씨가 경무청에 보고하였는데 이달 십구일 밤에 서울 천도한 김재천이가 일인 심천술 일 그 목덕미를 데리고 장단군 방목리 삼봉재 있는 고려국 양현왕 둘째 아들 무덤을 파고 옛 그릇들과 용 그린 석함과 벼룻돌과 각색 그릇을 돌라 가다가 본군 순괴들이 즉시 포착하여서 경무청으로 보내노라고 하였거늘 이달 이십육일 일인 둘은 일본 영사관에서 데려가고 조선 도적놈 둘만 경무청에 갇혔다더라.”

고려자기 거래가 양성화된 시점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다. 일본인 고위 통치층의 고려자기 수집 취미에 맞춰 이들의 묵인 하에 일본인 골동상들이 서울에 이를 취급하는 점포를 내기 시작했다.

이보다 훨씬 전인 개항기에 서양인의 수요에 따라 한국인 중개상들이 고려자기를 암암리에 거래하는 등 음성적인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W. R. 칼스의 경험담은 당시의 현실에 대해 잘 말해준다. 그는 평양을 방문했을 때 고려청자를 구입하고자 했으나 실패했다. 이는 평양의 일반적인 골동품 시장에서는 고려청자가 매매되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칼스는 마침내 서울에서 고려청자를 구할 수 있었다. 서양인들이 많이 체류하는 서울에서는 찾는 경우가 많아지자 잇속이 밝은 중개상들이 서서히 고려자기를 취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전통적인 윤리관에 위배되는 것이기에 거래를 하면서도 불안에 떨었다. 그런 조선인 고려청자 거간꾼들의 모습을 마르텔은 실감나게 전한다.

당시 조선인이 골동품을 팔러 오는 광경은 매우 재미있었다. 그들은 골동품을 보자기에 싸가지고 아주 소중하게 들고 오지만 그 태도가 도무지 심상치 않고 시종 주위를 살피는데 불안에 쫓기는 듯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건대, 거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즉, 양반의 소장품을 몰래 부탁 받고 팔러 오는 경우와 고분의 도굴품을 밀매하러 오는 경우였다.

일본인 상인들이 시세를 모르는 서양인들에게 엄청나게 비싼 가격에 파는 사례도 있었다. 일본인 골동상 취고당娶古堂 주인 사사키 쵸지佐佐木兆治는 1904~1905년 러일전쟁 당시의 일이라며 지인에게서 들은 얘기를 전한다. 5~10원이면 살 수 있는 조선의 오래된 그릇을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에게 200원에 팔아볼 심산이었는데 2,000원에 팔았다는 일화가 그것이다. 개항기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은 사회적 지위가 안정적인 정치인, 외교관, 학자, 여행가 등이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지불 능력을 가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양인에게 인기가 있었던 고려자기. 거의 대부분 무덤에서 꺼내져 서양인들에게 암암리에 팔렸다.

화가들이 서양인을 의식한 민속적 풍속화를 창안하고, 다량제작을 위해 기존에 없던 공동제작 방식을 도입하고, 중개상들이 윤리관에 위배되는 것임에도 무덤 속 고려청자를 취급하는 새로운 현상은 서양인의 구매 파워가 시장 참가자들을 움직일 만큼 강력했음을 보여준다.

개항기는 미술시장 수요자와 공급자 사이에서 미술품을 상품으로 바라보는 인식과 태도가 충분히 형성되지 않는 등 전근대와 근대가 혼재된 시기이기도 했다.

서양인들은 이러한 전환기에 등장하여 강력한 구매 의사와 뚜렷한 구매 목적, 높은 지불 능력을 토대로 화가와 중개상들의 경제적 이윤 동기를 자극하였던 것이다. 개항장과 대도시를 무대로 활동하던 시정의 화가 중에는 상업적 이익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서양인 취향에 맞춘 새로운 양식의 풍속화를 제작하고, 짧은 시간에 더 많이 그릴 수 있도록 제작 방법상에서 혁신을 꾀하는 이들이 출현하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고려자기 시장을 창출하기에 앞서 이미 개항기에 서양인 고객을 맞아 한국인 중개상을 중심으로 고려자기 신시장이 생겨났다는 사실은 비록 그것이 음성적인 거래라 하더라도 자본의 논리가 분명하게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