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동이 트기도 전인 이른 새벽, 노무현 전 대통령은 컴퓨터 전원을 켜고 유언을 작성했다. 그 마지막 말에는 노 전 대통령이 부패혐의로 인해 청렴한 지도자라는 마지막 남은 한 조각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음이 드러나 있었다.”
저런 문구로 시작하는 글은 2009년 5월 23일 미국 뉴욕타임스에 실린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부고(訃告) 기사다. 기사에는 ‘절망이 부패혐의에 휩싸인 대한민국 전임 대통령을 집어삼키다’라는 제목이 붙었다. 뉴욕타임스는 노 전 대통령의 생애를 소설처럼 풀어내면서 전문가의 평가까지 곁들였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글이지만 기사엔 노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기사 말미엔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상경하는 장면을 묘사돼 있다.
“노 전 대통령이 검찰의 소환에 응하자 언론사들은 헬리콥터를 투입해 노 전 대통령이 서울로 이동하는 내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대한민국에서 전임 대통령의 상경 과정을 생중계하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었으며, 이는 노 전 대통령을 심각하게 모욕하는 행위였다.”
노 전 대통령의 부고 기사는 최근 국내에 출간된 ‘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인간희극)의 한 꼭지를 차지하고 있다.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역사적으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는 데 반론의 여지가 없는 이들”의 별세 소식이 담긴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를 갈무리한 작품이다. 책을 펼치면 정치인뿐만 아니라 재계의 거물들과 팝스타들은 물론이고, 아돌프 아이히만이나 오사마 빈 라덴처럼 악명으로 세계인의 입길에 오르내린 인물들의 ‘최후’까지 만날 수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건 남북의 현대사에 봉우리처럼 솟아있는 인물들을 다룬 내용이다. 뉴욕타임스는 1994년 7월 8일,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북한 김일성의 부고를 실었다. 기사에는 김일성이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별세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느낌이 묻어 있다.
“(남북 정상회담은) 틀림없이 한국전쟁 이후 50년간 지속된 위태로운 교착 상태를 뒤로하고 냉전이 남긴 마지막 흔적인 최후의 분단국가 사이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상징적인 역할을 했을 것이다. 또한 수많은 한국인들 또한 김일성이 그토록 염원한 민족주의에 흠뻑 고취되었을 것이다. …(남북한은) 누구보다 먼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결국 이들은 냉전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 부고 기사에서는 당시의 긴박했던 한반도 상황을 느낄 수 있다. 박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전해지자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모든 지역엔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공항은 전부 폐쇄됐다. 미국은 한국에 주둔하던 미군 3만8000명에게 “비상 대기 명령”을 내렸다.
뉴욕타임스는 박 전 대통령 서거 직후 긴급회의 끝에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보도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서울은 적막에 싸여 있다. 공공건물 주변에서는 군인들이 목격됐고, 청와대 근처에는 탱크 두 대가 배치됐다. 그러나 이런 철저한 대비가 필요했을까 싶을 정도로 어떠한 형태의 폭동과 반정부 시위도 발생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 부고 모음집’을 엮은이는 현재 뉴욕타임스 부고 편집자인 윌리엄 맥도널드다. 그의 표현처럼 이 책은 “과거를 비추는 거대한 백미러에 비유할 수 있다.” 책에 실린 인물 대다수가 백인 남성이라는 사실은 현대사의 무게 중심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가늠케 만든다.
맥도널드는 “뉴욕타임스의 부고 기사 부서는 가장 뛰어난 작가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며 “앞으로 부고 기사나 디지털 멀티미디어나 가상현실의 형태 등으로 획기적인 방식을 취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