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각에선 기축통화 대체가능성도
몇몇 국가는 디지털화폐 발행 계획
다국적 거대기업들이 자체 암호화폐(가상화폐) 발행에 앞다퉈 뛰어들고 있다. 23억명에 이르는 회원을 보유한 페이스북의 암호화폐 ‘리브라(Libra)’는 가장 완성형에 가까운 암호화폐라는 평가를 받는다. 기업들이 암호화폐로 몰리자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본격적으로 암호화폐 규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리브라가 널리 통용되는데 성공하면 기축통화인 미국 달러의 자리까지 넘볼 수 있다고 예견한다.
지난달 18일(현지시각) AP통신은 “페이스북이 자체 개발한 암호화폐 리브라 백서(사업계획서)를 내놨다”고 밝혔다. 통상 백서는 투자자금을 모으기 위해 기업들이 암호화폐 발행 직전 발간한다. 리브라 발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기대로 이날 비트코인 가격은 1082만1000원에서 출발해 일주일 뒤인 25일 5.1% 오른 1135만원까지 뛰었다. 연초부터 비트코인 가격은 상승 흐름을 탔지만, 등락없이 꾸준히 오르기만 했다는 건 이례적이다.
리브라는 ‘천칭자리’라는 의미의 암호화폐로 페이스북이 2020년 발행 예정인 ‘스테이블 코인(stable coin)’이다. 스테이블 코인의 장점은 안정성이다. 가격이 시시각각으로 변해 화폐로서 기능을 하지 못했던 기존 암호화폐의 문제점을 상다 부분 극복할 수 있다. 리브라는 예치금에 달러뿐 아니라 여러 실물자산(채권, 다른 법정화폐, 금 등)도 넣어 기존 스테이블 코인과 다르다. 예치 자산이 다양해 급변하는 세계 경제 상황에도 예치금의 가치가 요동칠 가능성이 적다.
리브라는 암호화폐가 널리 사용되는 생태계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리브라 예치금에 투자한 28개 기업 중엔 비자(Visa), 마스터카드(Master Card) 같은 신용카드 결제업체와 이베이(eBay) 등 전자상거래 업체가 대거 포함됐다. 금융과 밀접한 기업들이 믿고 투자금을 내건 만큼 기술적 보완만 거치면 기존 ‘화폐질서’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높다.
각국의 반응도 리브라가 “기존 암호화폐와는 다르다”는 점을 증명한다. 리브라 백서가 발표되고 열흘 뒤인 지난달 28일(현지시각) 열린 주요20개국(G20) 정상회의에선 암호화폐를 ‘암호자산’으로 규정했다. 리브라가 등장하자 처음으로 국제 회의에서 암호화폐 대응 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에선 리브라가 상용화에 성공하면 달러(기축통화)를 대체할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 박성준 동국대 암호학 박사는 4일 “현금 없는 디지털 화폐로 가려는 움직임은 이미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며 “리브라 사용량이 많아질수록 법정화폐의 가치는 떨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다만 리브라가 넘어야 할 산은 많다. 미국과 유럽에선 화폐질서 교란, 자금세탁, 마약거래, 테러자금 조달 가능성 등의 이유를 들어 리브라를 비난하고 있다. 당장 오는 16일(현지시각) 미국 상하원과 증권거래위원회(SEC)에서 청문회를 열 예정이다. 프랑수아 빌레이 드갈로 프랑스 중앙은행 총재는 리브라를 중앙은행 화폐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일부 국가에서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려는 시도는 이어지고 있다. 디지털 화폐는 암호화폐를 포함하는 상위 개념이다. 지난 1월 한국은행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스웨덴 우루과이 등에서 종이지폐 발행비용을 줄이거나, 인프라 부족으로 금융서비스에 접근하지 못하는 국민을 위해 디지털 화폐 발행을 검토하고 있다. 한은 관계자는 “미국의 리브라 청문회 결과를 지켜보고 금융 당국과 디지털 화폐 관련한 논의를 이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최지웅 기자 wo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