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반환기념일인 지난 1일 시위대가 홍콩 입법회(의회) 건물에 난입해 기물을 부수는 폭력 시위를 한 것은 위기에 몰린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의 노림수에 말린 것이란 분석이 제기됐다. 의회 난입과 기물 파손 등 극단적인 폭력 행위를 방조함으로써 홍콩 시민들의 반감을 자극하고 세계의 여론을 돌려 시위대에 대한 강경 대응과 체포를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것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시위대의 의회 점거 과정에서 두가지가 눈에 띈다며 홍콩 정부의 방조가 의심된다고 3일 보도했다.
우선 연단을 점거한 시위대는 연단에 영국 식민지 시절 사용했던 영국령 홍콩기를 걸어 중국 지도부의 분노를 자극했다. 또 시위대가 의회 난입을 시도하는데도 경찰은 적극 제지를 하지 않아 젊은 시위대가 ‘폭력 시위’라는 실수를 하도록 내버려뒀다.
특히 캐리 람 장관의 지시 없이 경찰이 방어선에서 후퇴하기는 어렵고, 이는 중국 정부와의 교감도 필수라는 점에서 치밀한 계산이 깔려 있다고 FT는 분석했다. 의회 점거 전후를 돌이켜보면 의심을 살만한 정황이 보인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홍콩 시내에서 시위를 벌이던 시위대 일부에서 의회 진입 주장이 나온 것은 오전 11시 30분쯤이다. 이어 의회 주변에 있던 200명 가량의 시위대가 동조를 했고, 1시 30분쯤 의회 문을 부술 쇠봉과 철제 구조물을 끌고 의회로 향했다. 방패와 방독면, 소총을 든 경찰과 40여명이 근처에 있었지만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기만 했다.
오후 4시쯤 일부 유리벽이 부서졌지만 시위대는 의사당에 진입하지 않았다. 이어 5시쯤 시위대가 더 늘었고 의회의 다른쪽 유리벽을 부수기 시작했다. 경찰은 이번에도 크게 제지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시위대는 의회 점거를 하겠다는 뚜렷한 계획도 없이 우왕좌왕했다.
이어 9시쯤 일부 시위대의 만류 속에 강경파가 의회를 점거하고 스프레이로 곳곳에 ‘캐리 람 퇴진’ ‘시위대 석방’ 등의 구호와 온갖 낙서를 남겼다. 시위대는 의사당 연단 위에 있는 홍콩기 표장을 검은 스프레이로 훼손하고, 영국령 홍콩기를 연단 위에 펼치기도 했다. 의사당을 시위대의 해방구로 만든 이들은 자정 즈음 모두 의회를 빠져나갔다. 그 사이 시위대의 폭력적인 행동은 그대로 세계에 전파됐다. 캐리 람 장관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든 셈이다.
캐리람 장관은 기다렸다는 듯이 2일 새벽 4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입법회 건물에 몰려가 극단적인 폭력과 파괴 행위를 한 것을 엄중 비난한다”며 법률 파괴 행위를 끝까지 추적해 처벌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어 중국 홍콩특별행정구 연락판공실은 담화를 통해 “입법회 건물에서 발생한 폭력 사건에 경악하고 분노한다”며 가담자 처벌을 강조했고, 중국 외교부 홍콩 주재 사무소는 미국과 영국, 유럽연합(EU)을 겨냥해 중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홍콩 상공회의소도 시위대의 입법회 폭력 농성을 강력히 비난하는 성명을 내는 등 여론도 악화됐다.
3일에는 그동안 보도를 자제하던 중국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와 관영 신화통신까지 가세해 시위대의 폭력성을 집중 부각했다.
인민일보는 이날자 1면에 논평을 싣고 “이번 시위는 홍콩 사회 질서를 심각하게 파괴했고, 일국양제에 대한 마지노선을 공공연히 저촉했다”며 “어떤 사회도 이런 행위를 절대 용납하지 않는다. 홍콩 정부가 위법행위자들에게 끝까지 책임을 묻는 것을 지지한다”고 강조했다.
신화통신도 논평에서 “일부 극단주의 세력이 폭력적으로해 입법회를 점거했다”며 “이들의 폭력 행위는 홍콩 법치에 대한 도발이자 침범”이라고 비난했다.
중국 인민해방군은 홍콩 앞바다에서 군함과 헬기 등을 동원해 진행한 훈련 장면을 2일 오후 공개하며 홍콩 시위에 노골적인 경고메시지를 던졌다. 인민해방군은 지난달 26일 홍콩섬 앞바다에서 군함, 헬리콥터, 소형 고속정을 동원해 무장 군인들을 작전에 투입하는 훈련을 진행했다. 무장 군인들이 뱃머리에 도열해 있는 사진 배경에는 홍콩섬의 빌딩숲이 보여 마치 홍콩을 향해 진격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호주 국립대학의 애덤 니는 “인민해방군이 홍콩에 투입될 수 있다는 선명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고 말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만약 이번 의회 점거 시위에 대해 대규모 체포 시도가 이어진다면 홍콩의 많은 젊은이들을 더욱 급진적으로 만들어 심각한 불안과 폭력의 악순환을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