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정 “기억 파편화돼 진술 못해”…檢, 범행 동기 파악 결국 실패

입력 2019-07-01 15:32 수정 2019-07-01 16:01
'제주 전 남편 살해 사건' 피의자 고유정(36)이 12일 오전 제주 동부경찰서에서 제주지검으로 송치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고씨는 지난달 25일 제주시 조천읍의 한 펜션에서 피해자 강모(36)씨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19.06.12.

지난 5월 25일 제주도의 한 펜션에서 전 남편을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 등을 받는 고유정(36·여)이 긴급 체포된 지 한 달 만인 1일 재판에 넘겨졌다.

제주지검 수사팀은 이날 오후 중간 수사결과를 발표하며 고씨를 살인 및 사체유기·은닉 혐의로 구속기소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애초 포함돼 있던 사체훼손 혐의는 제외했다.

고씨는 5월 25일 제주시 조천읍 모 펜션에서 전 남편 강모(36)씨를 흉기로 수차례 찔러 살해한 후 시신을 훼손해 최소 3곳 이상의 다른 장소에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달 12일 사건을 경찰로부터 넘겨받은 검찰은 고씨의 범행동기와 방법 파악에 수사력을 집중했다. 구속기간도 1차례 연장했다. 그러나 검찰은 혐의 입증에 필요한 증거는 충분히 모았지만, 핵심 증거인 시신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또 구체적인 범행 동기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고씨는 경찰 조사 때와 마찬가지로 검찰에서도 ‘우발적 살인’이 벌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다만 검찰은 계획범죄 정황을 입증할 증거물 수십여점과 고씨 자백 등을 토대로 혐의 입증에는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고씨는 조사 과정에서 자신의 얼굴 노출 등을 문제 삼으며 진술을 거부했다. 이후에는 “기억이 파편화돼 일체의 진술을 할 수 없다”는 등의 태도를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피해자 시신의 행방을 수색 중인 경찰은 앞서 인천시와 경기도 김포시 소각장, 아파트 배관에서 발견한 뼛조각이 모두 동물 뼈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의 감정 회신을 받았다. 경찰은 지난달 29일 제주 환경자원순환센터에서 뼈로 추정되는 물체 20여 점을 발견해 국과수에 의뢰했지만, 이마저도 피해자의 것일 가능성은 매우 낮은 상태다.

장기석 제주지검 차장검사가 1일 오후 제주지검 중회의실에서 '제주 전 남편 살해 사건'의 피의자 고유정 기소와 관련해 브리핑을 하고 있다. 2019.7.1 jihopark@yna.co.kr/2019-07-01 15:12:59/

검찰 기소와는 별개로, 경찰의 초동수사가 미흡했다는 비판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조만간 경찰의 부실수사 의혹에 대한 조사를 하겠다고 공표한 상태다.

경찰청 조사단은 우선 초동수사가 미흡한 점을 조사할 것으로 보인다. 경찰 초동수사 미흡으로 고씨가 시신을 유기할 시간을 내어 주는 등 골든타임을 놓친 정황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면, 피해자 강씨가 이틀이 지나도록 집으로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은 지난 5월 27일 오후 6시10분께 부랴부랴 경찰서를 찾아가 신고했고, 이어 2시간 뒤에 112로도 재신고했다. 경찰은 피해자가 마지막으로 고씨와 통화한 사실을 확인해 고씨에 대한 전화 조사를 했다.

당시 고씨는 경찰에 “(피해자와) 아이 면접교섭으로 25일 만났다. (피해자가) 덮치려고 했는데 미수에 그치자 당일 밤 먼저 펜션을 나갔다”고 허위 진술했다.

경찰은 실종 신고가 이뤄진 27일 밤 제주시의 한 마트 주차장에 피해자 차량이 범행 이후 사흘째 그대로 세워져 있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별다른 의심없이 피해자 차량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심지어 차량 블랙박스 영상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블랙박스 영상 확인은 실종신고 다음 날인 28일 오후가 돼서야 유족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경찰은 또 실종 신고 직후 사건 현장도 찾았지만, 모형 폐쇄회로(CC)TV만 확인했을 뿐 고씨의 수상한 모습이 찍힌 인근 단독주택의 CCTV를 확인하지 못했다.

피해자 남동생은 경찰의 초동수사에 문제의식을 가졌고, 직접 인근을 뒤진 끝에 인근 단독주택의 CCTV 영상을 확인하고 경찰에 넘겼다. 실종신고 이후 나흘만이었다.

그 사이 고씨는 27일 해당 펜션에서 퇴실했으며, 다음 날인 28일 제주시 한 마트에서 종량제봉투 30장과 여행용 가방, 비닐장갑 등을 구입하고, 오후 8시30분 제주항에서 출항하는 완도행 여객선을 타고 제주를 빠져나갔다.

경찰이 신고 초반 제대로 수사에 나섰다면 피의자가 제주를 벗어나 시신을 유기하기 전에 체포할 수도 있었다는 비난이 쏟아지는 이유다. 경찰은 검찰이 고씨를 기소한 이날까지 피해자 시신을 찾지 못했다.

'제주 전 남편 살해 사건' 피의자 고유정(36)이 12일 오전 제주 동부경찰서에서 제주지검으로 송치된 가운데 피해자 유가족이 호송차를 막아서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고씨는 지난달 25일 제주시 조천읍의 한 펜션에서 피해자 강모(36)씨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2019.06.12.

유족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는 비판도 나온다. 경찰은 고씨가 범행 이틀 뒤인 지난 5월 27일 펜션을 떠나면서 인근 클린하우스 두 곳에 종량제봉투 5개를 나눠 버린 사실을 파악하고도 유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경찰은 지난달 22일 피해자 유족이 직접 펜션 인근 클린하우스 CCTV를 확인하고 나서야 고씨가 펜션 인근에서도 시신 일부를 담은 것으로 추정되는 종량제봉투를 버린 사실을 인정했다.

수사의 ‘기본’인 범죄 현장 보존도 미흡했다는 지적도 있다. 경찰은 수사 초기 범행 현장인 펜션 주인이 내부를 청소하겠다는 요청을 허락하는 등 수사의 기본인 범죄현장 보존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은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변명에만 급급한 모습을 보이며 여론의 화를 키웠다. 고유정사건 초동수사를 맡았던 제주동부서 소속 경찰관 5명은 지난 20일 경찰 내부 통신망인 ‘폴넷’에 ‘제주 전 남편 살인사건 수사 관련 입장문’이라는 제목의 글을 공동명의로 올렸다. 이 글은 박기남 제주동부서장 지시로 작성돼 게시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실종 시 수색 매뉴얼에 따라 피해자의 휴대전화 최종 기지국 신호 위치를 중심으로 수색하는 등 초동수사를 제대로 진행했다고 밝혔다. 다만, 당시 한정된 인력과 시간 때문에 최종 기지국 신호를 중심으로 수색할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혼한 부부가 어린 자녀와 있다가 자살 의심으로 신고된 사건에 대해 초기부터 강력사건으로 보고 수사했어야 했다는 비판은 결과론적 시각에서 바라본 비판이라고 말했다. 이들은 특히 고씨에 대해 현장검증을 하지 않은 데는 ‘야만적 현대판 조리돌림’을 우려한 박기남 서장의 결단이 있었다고 말해 피의자를 감싸는 모양새를 보이면서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분노한 여론은 지난달 26일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 ‘제주동부경찰서장 및 담당 경찰관의 징계 및 파면을 청원합니다’라는 제목의 청원 글을 올렸고, 1일 낮 12시 현재 약 1만7000명이 동의했다.

문동성 기자 the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