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전방위로 확산될 조짐이다. 일본 정부가 이달부터 스마트폰과 TV 등 전자제품에 쓰이는 반도체 원료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겠다고 발표했다.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판결에 대한 보복 성격이다. 일본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가 끝나자마자 한국을 향해 칼을 뽑아든 것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1일 스마트폰과 TV에 들어가는 반도체의 제조 과정에 필요한 재료 3품목의 한국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밝혔다고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이 보도했다. 강제징용 피해자 문제 해결을 위한 해결책 제시를 한국에 요구했음에도 사태가 진전될 기미가 없자 강경 조치를 단행했다는 것이다.
교도통신은 “이번 조치로 삼성전자 등 한국 반도체 대기업에 타격이 예상되며 한국 경제를 악화시킬 가능성도 있다”며 “일본 수출 기업에도 영향이 미칠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제재 대상은 TV와 스마트폰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디스플레이 및 반도체 재료로 쓰이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리지스트와 에칭가스(고순도불화수소) 등 3개 품목이다. 수출 규제 조치는 오는 4일 개시될 예정이다.
경제산업성은 이번 조치의 배경을 두고 ‘부적절한 사안의 발생’이라고만 밝혔을 뿐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하지만 지난해 10월 신일철주금(신일본제철)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1억씩 배상하라는 한국 대법원 판결에 대한 보복조치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일본은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와 리지스트는 세계 생산량의 90%, 에칭가스는 70%를 점유하고 있다. 우리 반도체 기업들은 이들 품목을 일본에 의존해왔다. 이번 규제 강화로 한국 대기업이 적잖은 영향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반면 일본 기업 역시 주요 고객인 한국 대기업으로의 판로가 막히게 되면 역시 피해가 불가피하다. 장기적으로는 한국 기업이 대체 공급로를 개척할 경우 일본 기업들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 하락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일본 정부 역시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유무역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모면할 수 없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번 결정은 아시아 내 반도체 산업 공급망을 훼손할 수도 있다”며 “일본이 통상법규를 자의적으로 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올 우려도 있다”고 전했다.
경제산업성 관계자는 산케이신문에 “무역 관리와 관련해 한국과 일정 기간 동안 대화가 이뤄지지 않았다”며 “정부 차원에서 한국에 확답을 요구했지만 G20 정상회의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도 한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일본 기업에 미칠 악영향에 대해서는 “주시해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일본 정부는 우호국에게 첨단재료 수출 허가신청을 면제하는 ‘화이트(백색) 국가’ 대상에서도 한국을 제외하는 방안도 내놨다. 일본 정부가 백색 국가 명단에서 특정 국가를 제외하는 건 한국이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조치가 실제로 이뤄지면 일본 기업이 해당 품목을 한국에 수출할 때 건별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일본 정부는 1일부터 오는 24일까지 공청회를 실시한 뒤 최종 결정을 내릴 방침이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