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북한에 국내산 쌀 5만t 지원을 본격화한다. 국제기구를 거쳐 212만명에게 지원될 예정이다. 북한의 우리 정부에 대한 맹비난에도 불구하고, 문재인정부는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다시 끌어내기 위해 인도적 지원과 유화적 메시지를 계속하겠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북·미 비핵화 협상이 재개되고, 인도적 지원도 본격 절차에 돌입한다면 남북 대화도 재개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통일부는 제306차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교추협)에서 북한에 국내산 쌀 5만t을 지원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대북 식량 지원을 위한 남북협력기금 지원(안)’을 심의·의결했다고 28일 밝혔다.
이번에 의결한 지원액은 5만t 쌀 구매에 필요한 272억6000만원과 운송비용 및 북한에서 분배·모니터링 활동을 하는데 필요한 부대비용 1177만4899달러(약 136억원) 등으로 총 408억원 규모다. 남북협력기금 인도적 지원 사업 예산(총 5328억원)이 활용된다.
정부가 지원하는 국내산 쌀 5만t은 세계식량계획(WFP)의 대북지원 사업 수혜 대상인 북한 내 120개 시·군 취약계층 총 212만명에게 지원된다. 이 가운데 149만5000명은 WFP의 영양지원 사업 대상인 임신·수유 중 여성과 영유아 등으로 ‘영양강화 식품’과 함께 쌀을 지원받게 된다. 나머지 62만5000명은 WFP의 취약계층 대상 취로사업에 참여하는 대가족, 여성 세대주, 장애인 포함 가족 등이다. 5만t의 분량으로 지원할 수 있는 인원을 WFP가 효율적으로 계산했다고 전해졌다. 정부는 앞서 지난달 영양지원사업을 위해 WFP 등에 이번 쌀 지원과 별개로 800만 달러를 공여한 바 있다.
북한은 전날 권정근 외무성 미국국장 명의의 담화를 통해 우리 측에 대해 비난을 쏟아냈다. 북한은 담화에서 “조·미(북·미) 관계를 중재하는 듯이 여론화하면서 몸값을 올려보려 하는 남조선당국자들에게도 한마디 하고 싶다. 지금 남조선당국자들은 저들도 한판 끼여 무엇인가 크게 하고 있는 듯한 냄새를 피우면서 제 설 자리를 찾아보려고 북남 사이에도 여전히 다양한 경로로 그 무슨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듯한 여론을 내돌리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우리가 미국에 연락할 것이 있으면 조·미 사이에 이미 전부터 가동되고 있는 연락통로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고 협상을 해도 조·미가 직접 마주 앉아 하게 되는 것만큼 남조선당국을 통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남한의 중재자 역할에 대해 강력하게 부인한 것이다.
북한의 맹비난에도 우리 정부는 쌀 지원과 같은 인도적 지원과 유화적 메시지로 교착 상태에 빠진 남북 대화 재개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조성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자문연구위원은 “북한이 비난하기 전부터 우리 정부의 인도적 지원은 결정된 사항으로 번복하기 어려운 것”이라며 “북한이 명시적으로 인도적 지원을 받지 않겠다고 한 적은 없다. 물밑에서 남북 간 조율 후 추진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전날 북한 외무성의 비난 담화는 협상판을 깨겠다는 의도보다는 협상력 제고를 위한 외교적 수사로 보인다”며 “이번 쌀 지원은 일회성이지만 이 같은 인도적 지원은 결과적으로는 향후 북한이 대화에 긍정적 반응을 보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재인정부는 2017년 남북 및 북·미 관계가 최악일 때도 ‘베를린 선언’을 통해 한반도 항구적 평화체제 구축 방안을 제시하는 등 지속적으로 북한에 유화적 메시지를 전했다. 북한의 반응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꾸준한 대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는 “2017년 북한이 미사일을 쏘고, 핵 실험을 할 때도 문재인정부는 일관되게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2018년이 되면서 대화국면으로 전환됐다”며 “이때의 경험이 작용하는 것 같고, 문재인정부의 기본적 인식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한편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이날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 청사에서 만나 한·미 북핵 수석대표 협의를 했다. 비건 대표가 “(오는 30일 예정된) 한·미 정상회담이 한반도 평화 번영을 위한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며 “6·12 싱가포르 공동성명의 공약을 동시적‧병행적으로 진전시키기 위해 북측과 건설적인 논의를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