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 번호 1282번. 그는 무기수다. 교도소에 틀어박혀 내내 편지를 썼다. 이 편지는 ‘사형수의 아버지’라 불리는 어느 승려에게 향했다. 그것도 무려 10년 동안. 승려는 “정신감정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27일 오후 3시 부산고등법원 301호 법정에서 그가 이토록 알리고 싶어했던 진실이 밝혀진다.
30년 전 엄궁동에서 벌어진 일
1990년 1월 4일, 부산 낙동강 변 엄궁동 555번지 갈대숲에서 참혹한 시신 한 구가 발견됐다. 인근 무역회사에서 일하던 여성 직원 박모씨였다. 살해당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사건현장. 목격자가 기억하는 유일한 단서는 범인은 2명이라는 것뿐이었다. 한 명은 키가 컸고, 또 다른 한 명은 키가 작았다고 했다. 당시 낙동강 변에서 잇따라 발생한 여러 사건의 범인과 흡사해 보였다. 일대에서 악명 높았던 이른바 ‘엄궁동 2인조’일 가능성이 높아보였다. 현장에는 범인을 특정할 만한 어떤 단서도 남아있지 않았다. 흔히 발견되는 지문 하나 나오지 않았다. 수사는 미궁을 맴돌았다.
느닷없이 용의자가 검거됐다. 2명이었는데 한 명은 키가 컸고, 다른 한 명은 키가 작았다. 낙동강 주변에서 자신들을 경찰이라고 속이며 돈을 갈취하고 다녔던 전력이 있었다. 수사관은 검거된 2명을 ‘엄궁동 2인조’라고 확신했다.
조서는 어딘가 수상했다. 마치 사건에 대해 잘 모르는 듯 10여 차례가 넘는 조사에서 진술은 계속해 바뀌었다. 기본적인 사실에 대한 진술조차 오락가락이었다. 어느 시점이 지나니 놀라울 만큼 일관성있는 조서가 꾸려졌다. 결론은 이랬다. 2인조 중 체격이 큰 최모씨가 각목으로 피해자를 때렸고, 키가 작은 장모씨가 돌로 여인을 내리찍어 죽였다. 이들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항소와 상고를 거쳤지만 대법원 판결은 변함없었다. 꼬박 21년을 복역했다.
“우리는 범인이 아닙니다”
당시 이들의 무죄를 확신하고 무죄를 위해 백방으로 뛰던 변호사는 바로 문재인 대통령이다. 그는 최씨와 장씨는 범인이 아니라고 단언했다. 문 대통령은 “장씨는 시력이 아주 나빴다. 범행 장소는 완전 돌밭이었다. 달도 없는 캄캄한 그런 밤에, 쫓고 쫓기는 식의 범행은 일반인도 힘들 텐데 시각장애인이 했을 리 만무하다. 그 때문에 나름의 확신을 했다”라고 말했다. 그때도, 지금도 장씨는 앞을 거의 볼 수 없다. 이 시력으로는 범행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어떻게 그들은 살인범이 되었을까. 먼저 자백을 한 사람은 최씨다. 최씨는 장씨의 시력장애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공범으로 장씨를 지목할 수밖에 없었다.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최씨에 따르면 경찰은 이들을 수시로 고문하며 계속해 다그쳤다. 인정하면 가혹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회유했고, 최씨는 결국 거짓 자백했다. 장씨 역시 고문을 당했다고 했다. 경찰은 장씨의 손에 파이프를 끼우고 거꾸로 매달아 얼굴에 물을 부었다. 어떻게 직접증거가 하나도 없는 사건에서 자백만으로 유죄판결을 받을 수 있었을까. 이 사건은 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겪었던 수많은 사건 중 가장 한이 되는 사건으로 남았다고 한다.
이들이 다시 법정에 선다
이미 형기를 마친 이들이 다시 재판에 선다. 자신들은 결코 살인을 저지른 적 없다고 호소했다. 이들은 “경찰 조사 중 고문을 받고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다”고 주장하며 2017년 5월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 4월 17일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이 사건에 대해 절차상 문제나 인권침해, 검찰권 남용 등이 없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결정했다. 과거사위는 이들이 ▲고문에 의해 허위 자백했다는 의혹 ▲수사기관에 신고하지 않았던 피해자에 대한 특수강도 범행이 실제 이뤄지지 않은 것이라는 의혹 ▲수사기록 일부가 고의로 누락·은폐됐다는 의혹 ▲이들의 진술에 대해 제대로 된 검증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혹 등에 대한 조사를 진행했다.
과거사위는 수사 과정에서 고문이 있었던 사실을 인정했다. 최씨와 장씨의 고문 피해 주장이 일관되며 함께 있었던 수감자의 목격 진술, 유사 사례 존재 등 객관적으로 확인된 내용과도 부합한다고 했다. 과거사위는 “부산 사하경찰서 수사팀에 의한 고문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설명했다.
검찰의 부실수사도 도마에 올랐다. 과거사위는 “당시 수사검사는 이들의 진술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고 송치된 기록 자체를 면밀히 검토하였더라면 발견할 수 있었던 각종 모순점들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채 기소하는 과오를 범했다”며 “설사 두 사람이 고문에 의해 허위 자백을 한 것이 아니라고 해도 자백과 객관적으로 확인된 사실들 사이에 모순이 존재하는데도 자백에만 기대 수사를 진행했다”고 밝혔다.
박준영 재심 변호사의 다짐
이들의 변호를 맡은 박준영 재심 변호사는 26일 자신의 SNS에 “‘낙동강변 살인사건’ 재판이 27일 오후 3시 부산고등법원 301호 법정에서 열린다”며 “국가폭력의 실체와 그 영향을 이분들의 증언으로 확인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이번 재판에는 당시 수사경찰 5명, 비슷한 시기에 사하경찰서 경찰들이 자행한 또 다른 고문 사건 피해자 2명 총 7명에 대한 증인신문이 예정되어 있다”며 “경찰들은 나오기 싫을 것이다. 안 나오면 쳐들어가 달라고 할 것이다(구인 절차). 무조건 부인할 것 같은 경찰들에 대한 증인신문이 만만치는 않지만, 그 자리에서 인정하고 반성하게끔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또 다른 고문 사건 피해자 2명은 당시 사하경찰서 경찰들의 고문방식, 수사책임자가 동일함을 증언할 것”이라며 “수건을 뒤집어씌우고 물을 붓는 상황에서 항복하고 싶을 때, 고문기술자는 검지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라고 미리 가르쳤다. 고문으로 인한 자백 때문에 무기징역을 받고 21년 넘게 억울한 옥살이(무기징역 복역 중 감형)를 한 이들과 그 가족의 고통에 우리는 가슴 아파했다”고 설명했다.
위법수사를 자행한 수사진의 근황도 전했다. 특진을 거듭하며 승승장구했다. 박 변호사는 이들 모두를 증인으로 불렀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