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이야기] 87.연기상 수상자 배우 전국향, “나이 들면서 무대가 무서워지고 연기도 어려워지는 것 같다”

입력 2019-06-24 08:18

“나이가 들면서 무대가 무서워지고 연기도 더 어려워져요. 어떻게 하면 더 편하게 잘 놀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어찌됐든 잘 하는 배우, 좋은 배우이고 싶죠. 그러기 위해서 좋은 사람이고 싶어요. 연극은 사람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좋은 사람이어야 좋은 연기도 나오는 것 같아요.”

올해 40회 서울연극제 출품작 <단편소설집>에서 작가이자 교수인 루스 스타이너로 분해 연기상을 수상한 전국향(57)은 “제대로 된 극중 인물로 미쳐 보고 싶다”고 말했다. 섬세한 감정과 정확한 대사로 극중 인물을 무대로 그린다는 평가를 받아온 배우의 인터뷰 첫 마디였다. 서울연극제에서 연기상은 2009년도 <홍어>로 받은 뒤 2관왕이다. 지난해 공연한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율구> 등이 연극상과 ‘동아연극상’을 휩쓸었다. 대다수 작품들이 좋은 평가를 받지만 작품과 극중 인물들의 윤곽을 무대에서 그려내는 조력사 역할을 해온 그는 빠져있었다. 편안한 연기, 극증인물로 몰입해 숨 쉬는 감정의 전류를 무대로 흘려낼 줄 아는 이 노련한 배우에게 큰상은 비켜갔지만 무관심해 보였다.

그는 “작품마다 극중 인물을 무대에서 다 불태우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워요. 배우로는 그런 작품과 역할을 만나 보는 게 배우의 로망”이라고 했다. 배우 전국향은 일 년 평균 4~5개 연극을 올리며 다양한 극중 인물을 녹여내는 바쁜 배우로 불리고 있다. JTBC드라마 ‘바람이 분다’에도 출연하고 있지만 “드라마보다는 연극이 체질에 맞는 것 같다”는 그를 대학로 카페에서 만났다. 남편인 배우 신현종은 기억을 도왔고 자리를 지켰다. 두 배우를 알게된 게 20대 때였다. 30년이 흘렀다.

-<단편소설집> 루스 역으로 제40회 서울연극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했다. 작품을 보면서 배우 전국향은 극중 인물을 흡수하는 내면의 감성과 대사에 힘을 느꼈다.

“3년 전에 초연을 올리고 이번이 재공연이었어요. 사실 희곡을 처음 봤을 때는 전혀 모르겠는 거예요. 줄곧 창작극만 하다가 번역극이었는데 대사도 너무 많고, 루스가 나랑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어요. 공연 때까지 ‘이 작품 할 수 있나?’ 싶었는데 첫 공연 끝나고 ‘너무 좋은 작품이구나’ 알게 됐어요. 루스라는 인물에 인생이 다 담겨 있더라고요. 연습할 때는 그런 생각을 못했는데 이번에 다시 작품을 하면서 뭔가 ‘탁’ 하고 느낌이 묵직해 진 것 같아.”

-서울연극제에서 연기상 2관왕이다.

“이 작품 초연 때 ‘서울연극인대상’에서 연기상을 받은 적이 있어요. 이번에는 후배가 받았으면 좋겠다, 했거든요. 리사 모리슨 역할을 한 소진이가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요. 관객 평가도 좋았고 배우로 인물을 소화하는 것도 훨씬 달랐어요. 기쁘고 감사하지만 같이 열심히 했는데 미안하더라고요”. “소진아 정말 고생 했어”

-<단편소설집>작품이 2016년도에 초연을 거쳐 이번 서울연극제에서는 재현 작품이다. 극중 인물을 다르게 접근하려고 한 것 같다. 극 후반에 갈수록 심리적인 내면상태를 표현하는 게 섬세해 진 것 같다.

“이번 공연에서는 그때 놓친 ‘작가와 지식인의 정서와 심리상태’를 더 찾으려 했어요. 심리적인 것들. 예를 들면 후반부에서 제자인 리사가 결국 작품을 내잖아요. 그런데서 오는 미묘한 것들이 있고 대사로 들어나지는 않지만 인물로 완전히 체득되어 표현해야 하는 것들이 있어요. 작품에서는 작가수업을 하는 선생과 제자 관계지만, 배우로서 선배와 후배로도 느껴지더라고요. 후배들은 치고 올라오고, 저는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있는 위치니까요. 작가로서의 삶은 안 살아봤지만 그런 식으로 인물의 내면, 심리적인 상태와 대입하고 접근하면서 인물이 편안하게 느껴졌어요.”

-긴 서사를 김소진 배우와 두 사람의 호흡으로 끌고 가는 2인극이다. 리듬과 템포, 연기의 호흡이 처지면 극의 생명도 깨질 수 있다. 길게도 느껴졌다.

“호흡이 좋았어요. 큰 라인이 정해지면 그 안에서 상황과 감정을 자잘하게 바꿔가면서 만들어가는 게 많았는데 서로 잘 맞았어요. 소진 배우가 굉장히 성실하거든요. 꾸미지 않고 진심으로 연기하는 배우예요. 둘이 주고받는 것보다는, 한 번 호흡을 놓치면 다시 잡기가 어려워서 두 시간 반 동안 정신적으로 집중하고 몰입하는 게 힘들었어요.”

배우 전국향은 고등학교 1학년부터 연극을 해왔다. ‘고교동랑연극제’에 출전한 학교가 작품상을 받고 서울예술전문대학(현 서울예술대학교)에 특별전형으로 입학하면서 연극배우의 길을 걸었다. 어렸을 때는 고전무용학원을 다니며 ‘한국무용가’가 되려고 했다. 꿈은, 학창시절 TV 텔레비전을 보면서 ‘배우’가 되고 싶었고 ,40년을 묵묵히 무대에 섰다. 졸업 후 현대극장에서 <왕과나>, <돈키호테> 등 다양한 작품을 이병훈 연출과 했고, 극단 목화에서는 <춘풍의 처>, <비닐하우스>,<필부의 꿈>등 굵직한 작품들에서도 좋은 연기를 보여줬다. 90년도에 결혼하면서 연극인 부부가 됐다.

-“출연한 작품들이 고른 평가를 받았다. 한 해 평균 몇 작품 정도 하나.” 배우 전국향은 지난 일은 빠르게 잊는 것 같았다. 작품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남편에게 물었고 신현종은 창밖을 보면서도 답했다.

“글쎄, 작년에는 <신의 아그네스>,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애도하는 사람>, <아버지의 선물>, <율구> 했고, 올해는 <이카이노의 눈>, <인형의 집, Part 2>, <단편소설집> 올렸어요. 하반기에는 <알리바이 연대기>와 <율구> 재공연을 앞두고 있어요. 보통 다섯 작품 정도 하는 것 같아요.”

-매년 연극을 많이 하는 편이다. 인물을 비워내고 빠르게 다시 채우는 게 쉽지는 않을 것 같은데.

“단순해서 빨리 받아들이는 편이에요.(웃음) 어떤 집중력인 것 같아요. 한 인물을 만나면 그 인물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이전 생각은 잘 안 나요. 그 인물을 계속 생각하다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다른 배우들도 다 그럴 거예요.”

-남편도 연극배우라 편할 것 같다.

“고맙죠. 작품이 들어가면 일상생활부터 인물로 초 집중하는 습관이 있어요. 공연이 끝날 때 까지 그렇기 때문에 그때 마다 집안 살림살이는 남편이 해줘요.(웃음) 뭐라고 할까. 인물을 몸으로 정서로 체득시키는 과정에서는 아무것도 못해요. 희곡읽기부터 시작해서 주어진 역할을 연습하다가 인물의 감정이 한순간에 ‘확’ 올 때가 있거든. 그렇게 끝나면 지우고 다시 채워 넣는 과정이 힘겹지만 배우로서의 삶이 다 같으니까. 남편이 곁에서 많이 도와주려고해요.” 이 말을 듣고서 천상 배우라고 하자. 전국향은 “배우들이 다 그런 거 아냐”하며 남편을 쳐다봤다.

-연극인 두 사람의 결혼과 연극인으로 걸어가는 인생이 쉽지 만은 않았을 것 같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건 모든 연극인들이 안고 사는 거잖아요. 저는 연극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결혼하기 전에 그 말은 했죠. ‘나한테 연극 그만두라고 할 거면 나는 결혼 안 한다. 첫 번째는 연극이다.’ 그랬어요. 때때로 힘들 때도 물론 있었지만 살아 보니까 연극인 부부 괜찮을 것 같아요. 서로 상황을 잘 아니까요. 제가 연습 들어가면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모든 신경을 인물에만 쓰는데, 가족들이 많이 이해해줘요.”

-불편한 점도 있죠?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아요. 그런데 연습할 때는 배우와 배우로 만나는 거지, 남편과 부인이 아니잖아요. 문제는 그게 저는 되는데 남편은 자꾸 잊는 것 같아요. 너무 잔소리를 하니까 집중이 다 깨지는 거예요. 연습실에서는 아는 척 안 했으면 좋겠어요.”(웃음)

-남편이 부인을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다.(웃음) 딸은 연극배우인 부모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자랑스러워해요. 저는 계속 ‘이게 맞나? 어떻게 하지?’ 의심하고 고민하는 편이에요. 저는 무대에 있으니까 어떻게 보이는지 모르잖아요. 누가 말을 해주면 좋겠는데 요즘에는 연출가들도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잘 안 하거든요. 그럴 때 ‘엄마는 최고의 배우야, 의심하지 말고 엄마를 믿고 하면 돼.’ 그렇게 힘을 줘요. 고맙죠.”

-배우 전국향의 대표작은.

“생각해봤는데 없더라고요. 아직 오지 않은 거 같아요. 저를 깰 수 있는 인물을 만나서 무대에서 한번 미쳐보고 싶어요. 말 그대로 ‘저 배우 정말 미쳤구나’ 할 정도로. 나이가 들면서 익숙한 역할에만 안주하려고 하는 것 같아서 작품 할 때마다 변화를 주려고 하거든요. 전국향만의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데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해요.”

-연기상 수상자에게 다시 하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쉬운 작품이 있나?

“했던 작품 다 좋았던 것 같아요. 다들 그렇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만드니까 다 기억에 남죠. 아쉬웠던 작품이라면 아무래도 가장 최근에 한 <단편소설집>이에요. 이 작품이 인생작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아직도 풀리지 않은 뭔가가 있는 것 같아요. 또 하면 잘 할 수 있을까? 글쎄요, 다시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었거든요.”(웃음)

-전국향 배우의 황금기가 작년부터 이어진 것 같다. 중년 이후가 활동이 더 활발하다. 앞으로도 무대에 설 텐데 배우로서 목표를 말해 달라.

“저 스스로 자유로운 배우라고 생각하는데 좀 더 잘 놀았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들면서 점점 무대가 무서워지고 연기도 더 어려워져요. 어떻게 하면 더 편하게 잘 놀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해요. 어찌됐든 잘 하는 배우, 좋은 배우이고 싶죠. 그러기 위해서 좋은 사람이고 싶어요. 연극은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거니까 좋은 사람이어야 좋은 연기도 나오는 것 같아요.”

-40년을 가까이 배우로 살아온 삶, 만족할 것 같다.

“그럼. 저는 다시 태어나도 배우로 살고 싶어요. 아직 못해본 역할도 많고요. 대신 다음에는 예쁘게 태어나서 예쁜 역할만 할 거예요.(웃음) 할 수 있을까? 글쎄. 다시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너무 힘들었거든요.(웃음) 하지만 연극배우의 삶은 만족해요.”

배우 전국향은 여전히 소녀 같았고 감성은 풍부했다. 40년을 주어진 역할을 지우고 다시 그려온 그에게 사진부터 촬영하자는 말은 어색해 했다. 인터뷰 질문에 남편인 배우 신현종이 긴장된 시선으로 쳐다보고 기억을 환기시키면 전국향의 표정도 달라졌다. “내가 더 깐깐한 사람인데, 집 사람 한 테는 못 당해. 나도 그게 좋고, 만족해”. 연극인 부부의 삶이 <단편소설집> 보다도 극적인 삶을 다루는 2인극처럼 보였다.








대경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