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원 ‘머슴’ 지칭에, 환자복 ‘법정 패션’…‘한보사태’ 정태수 前회장 누구?

입력 2019-06-24 07:40 수정 2019-06-24 07:52
TV조선 캡처/국민일보DB

해외 도피 생활 21년 만에 국내로 송환된 정한근(54)씨의 부친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촉발한 ‘한보사태’의 장본인이다.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지만, 6년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고 다른 횡령 사건으로 다시 재판을 받던 중 자취를 감췄다. 10여년째 행방이 묘연한 정 전 회장은 살아있다면 올해 96세로, 고령이다. 정씨는 “아버지가 지난해 사망했다”고 진술했지만 검찰은 단정할 수 없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국세청 세무공무원으로 일했던 정 전 회장은 1974년 ‘한보상사’를 설립하며 사업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52세.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한 사업이었지만, 급속도로 성장했다. 창업 2년 뒤 ‘한보주택’을 세워 서울 대치동에 ‘은미아파트’를 건설, 큰돈을 벌었고 1980년에는 ‘한보철강’을 시작하며 한보그룹은 대기업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재계서열 14위까지 성장했던 한보그룹은 1997년 1월 한보철강의 부도로 위기를 맞았다. 무리한 사업 확장이 화근이 됐다. 당시 한보그룹이 은행권 등에서 받은 대출 규모는 약 5조원. 사실상 부실기업이었던 한보그룹이 이같이 큰 규모의 대출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정관계 고위 인사 등에게 각종 로비를 하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후 정치인, 전직 은행장 등 10여명과 고(故) 김영삼 대통령 차남 김현철씨까지 구속되면서 이 사건은 사상 최대 금융비리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7년 4월 국회 청문회 당시 정 전 회장이 했던 발언은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한보그룹 임원과 자신이 밝힌 비자금 액수에 차이가 난다는 지적을 받자 “자금이라는건 주인인 내가 알지 머슴이 어떻게 압니까?”라고 말했다. 국민들은 정 전 회장이 회사 직원인 임원을 “머슴”으로 지칭한 데 크게 분노했다.

정 전 회장은 같은 해 특정경제가중처벌법상 횡령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환자복 차림에 휠체어를 타고 법정을 드나들던 정 전 회장의 모습은 이후 여러 재벌총수 등에 의해 ‘패러디’됐다. 그는 이후 수감 생활 6년 만인 2002년 병보석으로 특별사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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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전 회장은 2007년 다시 법정에 섰다. 이번에는 자신이 세운 ‘한보학원’ 교비 72억원을 빼돌린 혐의였다. 그는 1심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았지만 2심 재판을 받던 중 암 치료를 받겠다며 일본으로 출국했다. 이후 12년간 종적을 감췄다. 정 전 회장이 금광 사업을 위해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을 전전하고 있다는 소문이 한때 돌기도 했으나, 현재까지 행방은 물론 생사조차 불분명하다.

이번에 붙잡힌 정 전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씨는 1998년 한보그룹 자회사를 운영하면서 322억원의 주식 매각자금을 빼돌린 혐의 등으로 검찰 수사를 받다 잠적했다. 미스터리였던 그의 행적은 2017년 한 매체가 보도한 “정한근이 미국에 있다”는 측근의 인터뷰를 통해 전해졌고, 검찰은 국제공조 끝에 그가 미국 시민권자 신분으로 에콰도르에 입국해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도피 생활 중 해외에서 붙잡힌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 씨가 22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송환되고 있다. 정 씨는 한보그룹 자회사인 동아시아가스 자금 322억원을 횡령하고 국외로 자금을 빼돌린 혐의를 받는다.

정씨는 국내 송환 후 검찰에 “아버지가 지난해 사망했고, 임종을 지켰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검찰은 정씨의 말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물증을 찾고 있다. 정씨가 정 전 회장의 국내송환을 막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정 전 회장이 아직 살아있고, 국내로 송환된다면 교비 횡령으로 인해 대법원에서 확정된 징역 3년6개월을 살아야 한다. 국세 채납액도 있다. 2014년 국세청이 공개한 ‘고액·상습 체납자’ 명단에 따르면 정 전 회장의 국세 체납액은 2225억원이 넘는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