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변호사는 수차례 어려움을 딛고 변호사 자격을 얻었다. 남들이 부러워할 서울대 경제학과에 진학해 한때 경제학을 학문적으로 파고들 생각도 했다. 황 변호사는 “학교생활을 하며 자연스레 만난 동기와 선배들의 진중한 고민을 듣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결심했다”고 털어놨다. 주변에 하나 둘씩 법조인이 늘며 대학 졸업 즈음 그도 본격적으로 사시를 준비했다.
공부 머리가 있어 객관식인 사시 1차 시험은 쉽게 붙었다. 하지만 서술형인 2차 시험부터 그는 7~8년간 6차례가량 고배를 마셨다. 황 변호사는 “혼자 공부하며 외로움과 다투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법조인의 꿈을 포기하려는 찰나 로스쿨 제도가 생겼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부산대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에 진학했다. 황 변호사는 사시공부를 할 때보다 로스쿨에서 공부를 더 많이 했다고 한다. 함께 과제하고 논의하는 공부방식이 그에게 더 맞았던 것이다. 로스쿨은 그의 인생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지금의 아내도 만났다. 그와 아내는 2015년 4월 변호사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부부 변호사가 탄생한 것이다.
그 무렵 황 변호사의 행복을 시기하듯 불행도 찾아왔다. 그의 법조인 선배이자 존경하는 부친(황규정)이 같은 해 여름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것이다. 부친은 아들의 변호사 시험 합격소식을 듣고 이듬해 눈을 감았다. 황 변호사는 “부친은 말수가 적고 보수적인 분이라 생전에는 오해도 많이 했다”며 “하지만 지금은 이 어려운 일을 어떻게 40년 넘게 하셨을까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황 변호사는 아직도 부친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할 때가 많다. 황 변호사는 힘든 20, 30대를 보냈기에 어려운 상황의 의뢰인을 쉬 넘기지 못한다. 여전히 인간적인 감성을 지닌 황 변호사를 만나 그의 철학과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봤다.
-변호사가 되기까지 과정이 궁금하다.
“처음부터 법조인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던 건 아니다. 서울대 진학 당시 전공도 경제학과였다. 그런데 학교 선‧후배, 동기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재학 중에 사법고시에 합격한 친구도 있었고 이미 사시에 합격한 선배들이 학교를 찾아오기도 했다. 그들이 진중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좋았다. 법조인의 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2000년대 초반 사법시험을 통한 선발 인원도 1000명가량으로 크게 늘었다. 1차 합격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희망고문이랄까. 공부한 양이 있으니 계속해서 1차는 합격해서 7~8년간 모두 6번 정도 2차 시험을 본 것 같다. 2차 시험에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사법시험 제도도 사라진다고 해 변호사가 되는 걸 포기할까도 생각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로스쿨에 진학했다. 아이러니하게 사법시험 때보다 로스쿨 때 공부를 더 많이 한 것 같다. 여러 명이 토론하고 과제를 하니까 공부가 정말 재밌었다. 3년간 로스쿨에서 아주 행복했다. 로스쿨 동기인 아내도 만났다. 매일 같은 수업을 듣고 이야기를 하니 가까워졌다.”
-실제 변호사의 삶은 어떤지.
“쉬운 일은 아니다. 스트레스가 많다. 변호사는 남의 일을 법률적으로 지원하는 직업인데, 이게 남 일 같지 않을 때가 많다. 민사소송을 많이 맡는다. 그럴 때면 사소한 분쟁으로 인해 의뢰인이 받을 불이익을 생각한다. 자다가도 깜짝 놀라 일어날 때가 있다. 특히 민사재판은 짧아야 1년이다. 재판은 한 달에 한 번씩 잡히는데, 증인을 부르거나 증거를 수집할 때는 이 기간이 들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머릿속에 붙잡고 있는 시간도 덩달아 늘어난다. 퇴근을 하고 휴가를 가도 생각을 떨치지 못할 때가 있다. 일반인들이 재판을 방청해보면 몇 분 안되는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부친에 대한 생각도 그랬다. 일반 회사원에 비해 출퇴근 시간이 자유로웠던 아버지였다. 보수적인 성향에 직설적인 성격을 갖고 계신 부친이었다. 부친이 돌아가시고 나니 ‘이 힘든 일을 어떻게 40년가량 했을가’하고 생각한다. 가끔씩 가슴이 먹먹해질 때가 있다. 갑작스러운 작고로 부산으로 내려와 부친이 하던 법률사무소를 이어받았다. 서울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는 아내에게는 미안한 일이다.”
-특이한 수임사건이 있는지.
“국선변호를 맡은 적이 있다. 변호사가 된 후 얼마 안 됐을 때의 일이다. 당시 국선변론의 대부분이 절도, 마약류관리에관한법률 위반 등 다툼이 없는 사건이었다. 그러다가 피고인 2명이 피해자 1명을 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의 국선변호를 맡았다. 피고인와 상담하는데 둘이 부자관계라는 걸 알게 됐다. 특히 아들은 일반인보다 지능이 떨어졌다. 술자리에서 시비가 붙었는데 피고인(아버지)는 원고가 아들을 모욕해 폭행했다고 주장했다. 드러내놓고 말하기 힘들지만 안타까운 상황도 있었다. 변호인으로서 재판장에게 부자지간의 정을 호소했다. 객관적인 사실은 크게 다투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심에서 부자 둘 다 벌금형을 받았다. 의뢰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힘 없는 사람 도와줘서 고맙다. 다른 사람이 어려움을 겪을 때 황준선 변호사를 소개하겠다’고 하더라. 의뢰인 입장에서는 남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게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 때를 잊을 수 없다.”
-로스쿨 등 법조인 제도에 대한 견해는.
“현행 로스쿨 제도가 큰 틀에서는 맞는 것 같다. 현행 로스쿨 제도가 비판받는 부분은 입학의 공정성 부분이다. 소위 말하는 금수저나 학벌에 따른 입학 결정 등이 문제다. 입시의 공정성 시비는 당연히 가려야 하고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 입시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교육을 통한 양성에서 시험을 통한 선발로 돌아가는 것은 적절치 않다. 로스쿨 출신들은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는 로스쿨의 취지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로스쿨 제도는 전문성을 필드에서 익히라는 취지다. 기본적인 지식과 법률적인 사고방식을 대학원에서 가르치고 실무는 현장에서 경험해 다양한 법률전문가를 양성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모든 것을 갖춘 인재를 요구한다. 전문성에 대한 논란은 시장이 가려줄 것이다. 역량이 부족한 변호사는 시장에서 도태된다. 사법시험 출신의 소수가 변호사로 있는 법률시장과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살아남은 다수 변호사들 중에 어떤 형태가 국민들의 법률수요를 충족할지 생각해봐야 한다. 실력 있는 변호사는 공부를 잘하는 변호사가 아니라 맡은 사건에 열정적으로 집중하는 변호사다.”
-후배들에게 조언한다면.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고 답하는 과정을 거치길 바란다. 변호사가 출세의 대명사인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지금은 다르다. 변호사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직업적 소명을 다하는 사회 구성원의 한 사람이다. 또 많은 스트레스를 견뎌야 하는 직업이기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그 속에서 삶에 대한 확고한 철학을 갖추길 바란다. 변호사가 된 뒤에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스스로도 그렇다. 좀 더 실력 있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성장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부친이 숱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법조인의 삶을 살았듯 꿋꿋하게 성장해 부친과 같은 법조인의 삶을 살고 싶다. 아직도 식은땀을 흘릴 때가 있지만 매일을 충실히 살다보면 믿고 찾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그 보답은 반드시 찾아온다.”
이은철 기자 dldms878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