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북한을 17년 연속 ‘최악의 인신매매’ 국가로 지정했다. 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방북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나 만찬을 하며 밀착을 과시하고 있을 때 발표됐다.
시 주석이 김 위원장과 만나 북한의 ‘뒷배’를 자처하자 미국이 북·중 밀월을 견제한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따라서 오는 28~29일 일본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서 열리는 미·중 정상회담도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미 국무부는 20일(현지시간) 발표한 ‘2019년 인신매매 실태보고서’에서 북한을 비롯한 21개국을 최하위 등급인 3등급 국가로 분류했다. 미 국무부는 2003년부터 매년 북한을 최저 등급 국가로 지목해왔다. 중국도 러시아 등과 함께 3년 연속, 3등급으로 지정됐다.
이는 매년 발표되는 연례보고서이지만 시 주석이 방북한 날 발표돼 미국의 불편한 심리가 반영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국무부는 보고서에서 “북한 정부는 인신매매 근절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완전히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북한 정권은 국내외에서 주민들의 강제노동으로 벌어들인 수익을 ‘범죄 행위들’의 자금을 대는 데 활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무부는 북한 정치범수용소에 8만∼12만명으로 추정되는 수용자들이 있으며 외화벌이 노동자는 약 9만명으로 대부분 중국과 러시아에서 일하고, 아프리카와 동남아, 유럽 등에도 있다고 설명했다. 국무부는 비정부기구 보고서를 이용해 북한 정부가 해외 노동자들을 통해 얻는 수익이 연간 수억 달러에 이른다고 전했다.
특히 국무부는 중국도 3등급 국가로 분류해 신장 위구르 지역의 이슬람 소수민족 탄압, 천안문 사태 30주년, 홍콩 시위 등으로 민감한 중국을 자극했다. 북·중 정상회담에 맞춰 인권 문제를 발표한 것은 북·중 간 과도한 밀착을 차단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된다.
시 주석과 김 위원장은 이날 정상회담과 만찬, 집단체조 관람 등을 통해 밀월 관계를 과시했다.
시 주석은 김 위원장이 주최한 환영만찬 연설에서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은 대세이며 평화로운 대화의 기치로 지역 및 세계의 평화와 안정, 번영 실현을 위해 공헌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시 주석은 “양측의 구세대 지도자들이 북·중 전통 우의를 만들어 우리에게 소중한 부를 남겼다”며 “상전벽해에도 북·중 우의는 오랜 세월 더욱 굳건해졌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시 주석과 만남에서 사회주의 제도를 견지하는 것이 북·중 친선의 핵심임을 확인했다”면서 “북한은 예전처럼 늘 중국과 나란히 함께하며 북·중 친선의 새로운 장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만찬에 앞서 가진 북·중 정상회담에서는 비핵화 관련 양측의 메시지가 두드러졌다. 이는 오사카에서 열리는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중이 비핵화 관련 입장을 미리 우회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해석된다.
우선 김 위원장은 “과거 1년간 조선(북한)은 긴장 완화를 위해 많은 적극적인 조치를 했지만 유관국의 적극적 호응을 얻지 못했다“며 ”조선은 인내심을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비핵화 노력을 많이 했는데 미국이 상응한 조치를 내놓지 않았다는 불만 표시다. 이는 김 위원장이 아직 미국 측에 추가적인 양보를 할 의사가 없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두 정상은 중국의 적극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공통된 인식을 나타냈다.
김 위원장은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과정에서 중국의 역할을 높이 평가면서 앞으로도 중국과 소통하고 협력을 강화하겠다고 했다.
시 주석은 “한반도 비핵화 실현에 적극적 역할을 하겠다”며 “북한의 안보 해결을 위해 중국이 돕겠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중국이 비핵화 논의 구조를 ‘4자 틀’로 확대해 본격적으로 끼어들기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시 주석은 “중국은 북한이 합리적 안보 및 발전에 관한 관심사를 해결하도록 힘 닿는 한 도움을 주겠다”며 든든한 후견인 역할을 자처했다.
특히 시 주석의 이번 방중에 중국 경제의 사령탑으로 불리는 허리펑 국가발전개혁위원회 주임(장관급)이 동행해 모종의 경제협력 논의가 이뤄진 게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김 위원장도 중국의 경제 발전과 민생 개선 경험을 배우겠다고 밝혔다. 우선 대북제재 때문에 당장 북한에 대한 경제지원은 불가능하겠지만 양측이 장기적인 차원의 플랜을 마련하는 논의가 진행됐을 수 있다.
따라서 시 주석이 오사카 미·중 정상회담에서 북한 비핵화와 관련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제시할 카드를 마련했을지 의문이다. 미국 백악관은 이미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검증된 비핵화(FFVD)가 목표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김 위원장이 새로운 양보나 결심을 하지 않는다면 중국이 미국과의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당초 일각에선 시 주석과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 논의를 통해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 미·중 무역전쟁 문제까지 논의를 진전시킬 수 있다는 관측이 있었으나 이 역시 불투명해졌다.
정상회담과 만찬을 마친 시 주석과 김 위원장은 리설주·펑리위안 여사와 함께 이날 오후 9시40분쯤 평양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불패의 사회주의’를 관람했다.
북한은 시 주석의 방북에 맞춰 이번 특별 공연을 준비했다. 당초 집단체조는 ‘인민의 나라’라는 제목으로 지난 3일 개막했다가 김 위원장의 지적으로 지난 10일부터 일시 중단됐었다. 이어 집단체조가 24일부터 재개될 예정이라고 공지됐는데, 시 주석의 방북에 맞춰 먼저 선보인 셈이다.
집단체조는 북·중 친선을 강조하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도 없다’, ‘조국을 노래하네’, ‘나는 그대 중국을 사랑하네’, ‘새 세계’, ‘붉은기 펄펄’ 등 중국 노래와 중국 민속무용도 선보였다.
집단체조를 관람하기 위해 10만여명의 관중이 5·1 경기장 관중석을 가득 채웠다. 공연은 모두 4장으로 이뤄졌으며 북한 사회주의 성과와 생활상, 북·중 우호관계, 시 주석의 방북 환영을 주제로 펼쳐졌다. 북·중 친선을 강조하는 내용의 ‘견고한 우의’ 장은 시 주석의 방북에 맞춰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두 정상 부부는 공연이 끝난 뒤 직접 무대에 올라 감사 인사를 한 뒤 기념촬영을 끝으로 공연 관람을 마쳤다.
베이징=노석철 특파원 schro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