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이 잇따른 반(反)정부 시위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퇴진 위기에 몰렸다. ‘우산혁명’으로 불리는 2014년 민주화 시위를 진압한 공로로 행정수반에 올랐던 캐리 람을 한순간에 무너뜨린 건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대규모 시위였다.
홍콩 인구의 30%인 200만명이 모인 지난 16일 시위에서 시민들은 캐리 람의 퇴진을 강력하게 촉구했다. 대규모 시위를 촉발한 건 범죄인 인도 법안이지만, 홍콩 시민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 캐리 람도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캐리 람은 공개 사과문을 발표했지만, 시민들의 분노는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홍콩 정부 관계자는 “시위 초기 시민들은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를 외쳤지만, 점차 캐리 람을 포함한 정부에게 화살을 겨누기 시작했다”고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말했다. 한 시위 참가자는 “캐리 람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행정장관이 될 자격이 있는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위에 연일 강경 대응하던 ‘철의 여인’, 결국 백기 투항
캐리 람은 이번 시위에 대해 강경 대응 방침을 이어가며 홍콩 민심에 불을 붙였다. 앞서 그는 시위대와 경찰 간 충돌이 있었던 지난 12일 시위를 “조직화된 폭동”으로 규정하고 범죄인 인도 법안을 철회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캐리 람은 또 시위대를 겨냥해 “아이의 버릇없는 행동을 그대로 두면 아이가 커서 왜 꾸짖지 않았냐고 물을 것”이라고 말하는 등 일명 ‘어머니론’을 설파하며 비판을 자초했다. 시민들의 강력한 반대에도 법안을 밀어붙이는 그를 두고 “홍콩판 철의 여인”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범죄인 인도 법안 반대 시위가 갈수록 격화되자 캐리 람은 백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지난 9일 시위에 100만명(주최 측 추산)에 달하는 시민들이 뛰쳐나오고, 그 다음날에는 현지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국제사회로부터 뭇매를 맞자 그는 법안을 사실상 무기한 연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시민들의 반대 시위는 멈추지 않았고, 시위대 규모는 일주일 만에 2배인 200만명으로 늘었다. 결국 캐리 람은 반대 시위 이후 처음으로 공식 사과문을 발표했다. 그는 “정부의 결함이 혼란을 일으켰다는 점을 인정한다”며 “모든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했다.
SCMP는 “캐리 람의 사과는 사실상 범죄인 인도 법안이 철회됐다는 뜻”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사과문 중 “법안을 다시 추진할 시간표가 없다”는 내용은 법안의 완전 폐기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이 신문은 전했다. 오는 2020년 7월에 홍콩 입법회 임기가 종료되면 이 법안은 ‘자연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계획이 다 있던 ‘완벽주의자’, 우산혁명 진압으로 주목 받아
캐리 람은 2년 전 중국 지도부에 의해 홍콩의 첫 여성 행정장관으로 선출됐다. ‘흙수저’ 출신 여성 공무원이 행정수반 자리에 오른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가 행정장관으로 뽑힌 결정적 이유는 2014년 완전직선제를 요구하던 민주화 시위 우산 혁명을 성공적으로 진압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무장관이었던 그는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켰고 1000여명을 체포했다. 이같은 캐리 람의 단호한 면모는 중국 지도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결국 2017년 3월 그는 자신이 옹호하던 간접선거제로 행정장관으로 선임됐다.
캐리 람은 홍콩 완차이의 가난한 노동자 집안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지만, 학창시절 내내 뛰어난 성적을 유지해 명문 홍콩대에 진학했다. 그는 대학 시절 저소득층 지원과 좌파 학생의 퇴학 처분 철회를 요구하는 시위에 참여했으나, 공무원이 된 이후 정치적 성향이 바뀐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개발국장을 맡았을 때는 시민들의 반대에도 영국의 홍콩 통치를 상징하는 건축물인 ‘퀸스피어(Queen’s Pier)’ 철거를 강행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번 시위를 계기로 캐리 람의 평소 모습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케네스 챈 홍콩침례대 교수는 “캐리 람은 오만한 지도자”라며 “그는 반대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런 비타협적인 태도가 지금의 사태를 낳은 것”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에 말했다. 캐리람은 지난해 파이낸셜타임스(FT)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완벽주의자(perfectionist)”라며 “항상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가기를 원할 뿐”이라고 말하며 그의 완벽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기도 했다.
“시진핑 가장 존경”…친중 성향이 독 됐나
캐리 람은 자신의 친중 성향을 종종 드러내기도 했다. 그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가장 존경스러운 지도자로 꼽은 일화는 유명하다. 캐리 람은 FT 인터뷰에서 “시 주석의 발언과 행동에서 점점 더 카리스마와 존경심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시 주석에 대한 호감과는 별개로 중국과 정치적으로 독립돼 있다고 덧붙였다.
이 때문에 캐리 람은 “중국의 꼭두각시”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그는 이에 대해 “내가 36년간 홍콩을 위해 일한 공로를 인정하지 않는 처사”라고 반박해왔다.
하지만 이번 범죄인 인도 법안 추진으로 그가 중국 정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오해는 불식되기 어려워 보인다. 홍콩 시민들은 중국 정부가 법안을 악용해 반체제 인사나 인권운동가들을 강제 송환하는 등 정치적 박해를 저지를 것을 우려하고 있다. 그동안 캐리 람은 중국 정부의 지지를 받으며 시민들의 반대에도 법안 추진을 강행해왔다.
캐리 람이 범죄인 인도 법안 연기 결정을 내린 것도 결국 중국 정부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일각에선 한정 중국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이 그에게 법안 연기를 지시했을 것이라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다른 친중 성향 정치인들마저 캐리 람에게 시민들과의 대화와 소통을 요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민아 기자 minaj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