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 밟는 자 나라 밟는다” 韓 여성인권 중심에 이희호 있었다

입력 2019-06-11 10:27 수정 2019-06-11 13:06
이하 뉴시스

평생을 여성인권운동가로 살아 온 이희호(97) 여사가 10일 밤 11시37분 별세했다. 1940년대 여성인권이라는 단어조차 자리 잡지 않았을 시절, 기울어진 사회에 분개한 이 여사는 1세대 여성인권운동가로서 제 목소리를 냈다.

이 여사의 어머니는 늘 “여자도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 “그 시절 아들 딸 차별하지 않는 부모 밑에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적었다.


“이 나라 여성인권 운동 성장의 중심에 이희호가 있었다”

1940년대 서울대 재학시절 이 여사의 별명은 ‘다스’(DAS)였다. 독일어로 중성 관사를 의미하는데, 이 여사가 ‘여성스럽게’ 행동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붙은 별명이었다. 그는 대학시절 사회운동에 집중했다. 특히 페미니즘 운동에 앞장서 남학생과 여학생의 동등한 권리를 숨 쉬듯 요구했다. 한 번은 술자리에서 남학생들은 맥주를 들이키는데 함께 있는 여학생들은 수줍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는 “여학생이 마실 수 있는 음료도 함께 준비하라”고 요청했다. 여학생들에게는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다니라”고 당부했다. 당시에는 여성과 남성이 한 자리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던 시대였다.

이 여사는 32세가 되던 해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스칼릿 대학에서 사회학 석사를 취득하면서 영어를 배웠다. 그는 해외에서 온 지지자 편지에 대한 답장을 쓰는 일이나 영어신문 스크랩을 스스로했다. 배움의 기회가 차별적으로 주어졌던 당시 그는 누구의 손을 빌리지 않고 이같은 일을 해내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사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건 1959년 37세때다. 견문이 넓어진 그는 여성인권투쟁에 본격 착수했다. 당시 여성계를 선도하던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의 총무직을 맡았는데, 그가 가장 먼저 제안한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 그 시절만 해도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본처는 쫓겨났고, 첩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는 일부일처제가 여성인권신장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다. 이 여사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그의 손에는 ‘아내를 밟는 자 나라를 밟는다’ ‘첩을 둔 자를 국회에 보내지 말라’는 문구가 들려있었다. 이후 그는 한국여성단체협의회 이사직을 역임했다.


1964년부터는 법(法)에 집중했다. 그는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자리에 오른 뒤 성차별에 기반한 법 조항 철폐를 위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성 노동자 저임금 문제 해결과 정치의식 함양을 위한 연구활동과 캠페인, 가족법 개정 등을 피력했다. 이때 시작된 가족법 개정 움직임은 1989년에서야 빛을 발휘했다. 여기에는 모계·부계 혈족을 모두 8촌까지 인정하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그는 영부인이 되면서 여성인권운동가로서의 직함 대다수를 내려놓았으나 여성문제연구회 만큼은 가장 마지막까지 애정을 갖고 참여했다.

이 여사는 90세가 되던 해 여성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아직도 성평등한 세상은 멀었다.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비정규직에 여성이 많다. 기업이나 공직의 책임 있는 자리에는 여성이 진출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출산, 보육, 육아 부담도 여전히 여성의 몫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데 여성가족부가 제 목소리를 내야한다”고 말했다. 현재의 여성가족부 전신(前身)은 그가 영부인 시절 공들여 세운 여성부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