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화의 인저리타임] 이천수를 보며… 벤투호를 바라보는 선배들의 자세

입력 2019-06-11 06:00
한국 축구대표팀 공격수 출신 이천수. 뉴시스

승리의 환희는 오직 스포츠에서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일 것이다. 하지만 환희도 반복될수록 반감된다. 관중은 새로운 자극을 원한다. 파격이 익숙해지면 새로운 파격을 요구한다. 공격적인 전술, 아름다운 전개, 예상을 뛰어넘는 선수 기용과 완성도를 관중은 요구한다. 이쯤 되면 승리만으로는 만족시킬 수 없다. 파울루 벤투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의 상황이 지금 그렇다. 누군가에게 보수적이고 재미없게 느껴지는 축구가 됐다.

한국 축구대표팀 공격수 출신 방송 해설자 이천수의 지난 주말 발언은 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1대 0으로 승리했던 지난 7일 호주와의 평가전을 비판했다. “이럴 거면 왜 뽑았는지 모르겠다. 믿고 뽑았으면 쓴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이천수의 입에서 독설은 낯설지 않지만, 이번만은 범상치 않았다. “대표팀에 뽑힌 선수는 국민에게 심사받고 인정받을 기회가 있어야 한다. 경쟁 체제가 돼야 발전한다. 선수들에게도 잘하면 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시켜야 한다.”

이천수는 2002 한일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작성했던 ‘히딩크 사단’의 일원이었다. 그의 발언은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대중의 욕구를 구체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말 한마디가 수많은 기사를 양산했다. 이천수가 출연한 유튜브 영상 조회수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그의 발언은 벤투 감독의 선수기용 논란에 제대로 기름을 끼얹었다.

이천수가 벤투 감독의 팀 운영방식에 독설을 퍼부었던 것은 처음이 아니다. 지난 3월 콜롬비아와의 평가전이 끝났을 때다. 지난해 러시아월드컵과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맹활약했던 골키퍼 조현우의 출전 전망을 비관적으로 보면서 “벤투 감독이 선수에게 폭넓은 믿음을 주지 못한다. ‘이 선수다’ 싶은 선수만 기용한다. 조현우가 (차출) 기준에 통과해도 벤투는 김승규뿐”이라고 했다. 이 말도 당시 큰 화제를 낳았다.

이천수는 박지성·이영표·안정환 등과 함께 2000년대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선수였다. 지금은 방송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지만, 한국 축구의 한 시절을 상징했다. 그의 예상과 분석에는 현장감이 녹아 있다. 더욱이 특유의 직설 화법까지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니 그의 말을 듣는 청취자는 즐겁다.

하지만 적절치 못하다. 이천수의 시각은 선수 관점에 무게가 실려 있다. 이천수처럼 한국 축구에 큰 족적을 남겼던 국가대표 출신은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에 대한 경계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말 한마디가 또 다른 여론을 형성해 대표팀 분위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평범한 축구팬들이 벤투 감독의 경기 운영방식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도, 국가대표 출신만큼은 차분한 표현으로 여론을 다독일 필요가 있다. 앞선 국가대표 선배들이 그랬다. 독설도 자기 과시용으로는 곤란하다. 팀 분위기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신중한 태도로 사용돼야 한다.

이천수는 유튜브에서 “벤투 감독이 이 영상을 보고 다음 경기에 조현우를 기용했으면 좋겠다”는 취지로 말하기도 했다. 그는 대표팀에 발탁된 이상 국민에게 인정받을 기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선수기용에서 감독의 판단과 직관은 ‘객관적 원칙’의 범주에 들어간다. 선수 기용은 감독의 권한이고, 감독 발탁은 대한축구협회에서 논의된 결과다. 감독의 운영 방식은 결국 협회에서 요구하는 대표팀 운영 방식과 일치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욱이 선수 선발만큼은 절대 침해할 수 없는 감독의 고유권한이다.

대중의 발언이나 여론에 일일이 응답하지 않는 벤투 감독이 이천수의 말에 귀 기울일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이천수의 발언이 대중적으로 납득된 이유는 러시아월드컵에서 스타덤에 오른 조현우가 김승규보다 높은 인지도를 가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부산 강서체육공원에서 8일 열린 오픈트레이닝데이에 파울루 벤투 감독이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있다. 뉴시스

벤투 감독의 경기 접근법은 분명하다. 그간 수차례 평가전에서 드러났듯 자신만의 철학이 뚜렷한 지휘자다. 훈련에서 직접 검증한 선수만 기용하며, 모험적인 카드보다 실리와 안정을 추구한다. 선수들도 이를 납득하고 있다.

주장 손흥민은 지난 3월, 처음 발탁된 이강인의 출전과 관련된 질문에 “열흘간 훈련하면서 성장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나도 어린 선수들이 뛰는 모습을 보고 싶지만, 좀 더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승우는 지난 9일 훈련을 앞둔 인터뷰에서 “모든 것은 감독님의 선택이다. 나는 선수로서 기다릴 뿐이다. 선수들은 항상 기다리고 준비가 돼 있어야 기회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대표팀 내에서만큼은 벤투 감독에 대한 신뢰와 궁극적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공감이 형성돼 있다는 얘기다.

모든 감독은 자신이 세운 원칙을 근거로 경기 접근법을 가진다. 협회는 벤투 감독을 선임했고, 벤투 감독은 자신의 축구를 하는 중이다. 과거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 시절부터 고수해온 그의 방식을 대중의 요구와 괴리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변화를 요구할 수는 없다. 이 같은 감독의 팀 운영방식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감독은 책임을 지는 자리다. 적어도 벤투 감독의 유임은 2019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아시안컵 8강에서 탈락한, 실패에 가까운 성적에도 부임 이후 지난 10개월간 이뤄낸 성과가 책임을 물을 수준이 아니라는 공감대에서 이뤄진 결과다. 공과 과는 결국 감독의 몫이고, 그 판단은 협회와 대중의 몫이다.

최종 목적지가 2022 카타르월드컵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벤투 감독은 월드컵에서 승리하기 위한 방식으로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 원칙을 바탕으로 한 안정된 운용을 택했다. 지금까지 벤투 감독의 운영 방식을 고려했을 때 앞으로도 대중이 원하는 자극을 얻기는 힘들 것이다.

이강인의 깜짝 선발 출전, 이승우의 파격 기용이 어쩌면 대중의 수요일 테다. 대중이 원하는 말을 하지도, 요구에도 반응하지 않는 감독이라면 그의 스타일에 적응하는 것도 경기를 지켜보는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천수의 축구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순간, 벤치에서 그를 묵묵히 지켜봤던 거스 히딩크 전 한국 대표팀 감독은 비난 여론을 감내했지만 결국 국민적 지지를 얻었다. 이미 17년 전, 히딩크 전 감독이 알려준 교훈이다.

송태화의 인저리타임

인저리타임. 전광판의 시계는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송태화 기자가 함성소리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전하는 스포츠 연재입니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