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항전 경기에서 킥 오프 전 국가를 제창하는 것은 축구계 오랜 관례다. 축구가 민족주의와 가장 잘 결합된 스포츠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 나라의 국기를 상징하는 유니폼을 입고 겨루는 축구 덕분에 전쟁이 줄었다는 분석도 있을 정도다. 정치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데 인색한 분위기가 형성된 유럽에서도 축구장에서만큼은 국가를 목청 높여 부르며 국기를 흔든다. 하지만 국가를 부르지 않는 선수도 있다. 스페인 선수들이 그렇다.
스페인 선수들은 국가인 ‘국왕행진곡’이 나올 때 고개를 숙이거나 무거운 표정을 짓는 것으로 경건한 마음을 대신한다. 합창하는 관중들과 달리 선수들은 절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가사가 없기 때문이다. 관중들이 부르는 가사는 2008년 비공식적으로 붙은 가사거나 과거 정권 시절 붙었던 가사다. 국왕행진곡의 가사는 1981년 공식적으로 완전히 삭제됐다. 이후 국제축구연맹(FIFA)에서 주관하는 국가대항전뿐 아니라 공식 석상에서는 가사 없이 전주만 흘러나온다.
국가에 가사를 없앤 이유는 두 가지다. 첫 번째는 파시스트 독재자였던 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 전 총통 시기의 정권 잔재를 없애기 위함이다. 프랑코는 1939년부터 1975년까지 스페인을 다스리며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철권통치를 휘둘렀던 독재자다.
두 번째는 민족의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서다. 스페인은 지중해 인종에 속하는 이베리아인을 조상으로 하면서도 많은 민족의 침입으로 혼혈이 이루어진 국가다. 17개 자치지방 중 민속·풍습·언어 면에서 유독 강한 지방색이 드러나는 곳은 4곳이다. 카탈루냐, 카스티야, 갈리시아, 바스크다. 기존의 국왕행진곡 가사는 카스티야 지역에 편향됐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스페인 국가에 관한 민족적 갈등은 축구장에서도 드러난다. 2014~2015시즌 스페인 국왕컵(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바르셀로나와 애슬레틱 빌바오가 맞붙었다. 관례대로 경기 전 국왕행진곡이 울려 퍼지자 경기장에 있던 대부분 관중은 모두 야유를 퍼부었다. 바르셀로나와 빌바오가 각각 카탈루냐와 바스크를 대표하는 구단들이었기 때문이다. 카탈루냐와 바스크는 스페인 중앙 정부에 독립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오랜 시간 이어오고 있다.
스페인 A매치에서 볼 수 있는 관중들의 국가 제창도 경기가 열리는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마드리드의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경기가 열릴 때와 바르셀로나의 홈구장인 누캄프에서 열릴 때는 가사를 제창하는 관중들의 목소리 크기가 다르다. 카스티야 지방에 속해 있는 마드리드 구장의 관중들은 비공식 가사를 크게 따라 부른다. 과거 스페인 통일의 주역이었던 카스티야 왕국의 후예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카탈루냐 주민들이 상대적으로 많이 분포된 바르셀로나 구장 관중들은 중앙정부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가사를 부르지 않는다. 바르셀로나와 빌바오 대결 때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의 민족적 갈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입을 다문 채 굳게 침묵하는 선수들과 목소리를 높여 가사를 제창하는 관중들은 스페인 경기를 보기 전 또 하나의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