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경찰 ‘고유정 사건’으로 수사력 총체적 부실·한계 드러내

입력 2019-06-09 10:57 수정 2019-06-09 13:01

제주의 한 펜션에서 전 남편을 살해한 ‘고유정 사건’으로 경찰의 수사력 부재와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경찰이 고유정(36)씨를 긴급체포한 후 9일째 수사를 이어가고 있지만 범행 동기는 물론 범죄혐의를 입증해야 할 직접적인 증거인 피해자 시신의 행방도 현재 오리무중이다.

더구나 범죄수사의 기본인 현장보존을 하지 않아 증거물이 훼손되고, 범행이 이뤄진 펜션 인근의 CCTV 영상은 피해자 유족이 찾아 경찰에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다.

9일 제주동부경찰서 등에 따르면 고씨는 지난달 25일쯤 제주시 조천읍의 한 펜션에서 전 남편인 A씨(36)를 만나 흉기로 살해한 뒤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지난 1일 경찰에 긴급체포됐다.

앞서 경찰은 지난달 27일 숨진 A씨의 남동생에게서 ‘전 부인을 만나러 간 형이 연락 두절됐다’는 신고를 접수하고 곧바로 피해자의 행적 파악에 나섰다.

경찰은 A씨가 지난달 25일 오후 4시20분쯤 전 부인 고씨와 함께 조천읍의 한 펜션에 들어간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고씨의 수상한 모습이 찍힌 인근 단독주택의 CCTV는 확인하지 못한 채 모형 CCTV만 발견하고 돌아섰다. 이로 인해 고씨는 살해한 남편의 시신을 담은 것으로 추정되는 가방 두 개를 차량 트렁크에 싣고 28일 전남 완도행 배편으로 제주를 빠져나왔다.

당시 초동수사가 제대로 이뤄졌더라면 경찰은 고씨가 유기하려던 시신을 찾아 범행전모를 사전에 밝힐 수 있었다. 결국 경찰의 초동수사에 의문을 가진 A씨의 남동생이 실종신고 나흘 뒤인 지난달 31일 펜션 인근 단독주택의 CCTV 영상을 확보해 경찰에 넘기면서 다음날 충북 청주에서 고씨가 긴급체포됐다.

경찰은 또 범행이 이뤄진 펜션의 주인이 강하게 반발한다는 이유로 현장검증도 하지 못하고, 범죄현장도 보존하지 않은 탓에 펜션 내 혈흔 등 증거물을 제대로 수집하지 못했다. 펜션 주인이 보존되지 않은 범죄현장에 남겨진 혈흔 등을 표백제로 닦아내며 범행 흔적이 대부분 지워진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이와 함께 지난달 18일 제주로 들어온 고씨가 범행을 저지르기 전인 지난달 25일까지의 동선, 27일 펜션에서 퇴실하고 다음날 제주를 빠져나가기 전까지의 동선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경찰이 고씨의 진술에만 의존한 채 수사를 오락가락 진행해오면서 유기된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어 수사가 장기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살인 혐의를 인정한 고씨가 시신을 바다에 버린 시간대 등에 대해서는 일절 함구하면서 막연히 “시신을 바다에 버렸다”고 진술하자 경찰은 곧바로 해경에 ‘변사체 수색 요청’ 공문을 보냈다.

경찰이 여객선의 CCTV 영상도 제대로 분석하지 않은 채 시신 유기 장소와 시간대를 특정해주지 않자 해경은 제주~완도 간의 92㎞ 해상 구간 전체에 대해 수색에 나섰다.

경찰은 행여 시신이 바다에서 어선 등에 의해 발견될 것을 우려해 해경에 형식적인 수사를 요청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일고 있다.

경찰은 해경에 수색 요청한 다음 날인 4일 고씨가 오후 8시30분 출항하는 여객선에 탑승한 지 1시간 만인 오후 9시30분쯤 여행 가방에서 무언가 담긴 봉지를 꺼내 수차례에 걸쳐 바다에 버리는 모습이 담긴 CCTV 영상을 확보했다.

경찰은 현재 시신을 유기했을 가능성이 높은 제주∼완도 간 여객선 항로와 완도항 인근, 고씨가 차량으로 이동한 경기 김포 등에 시신을 유기했을 것으로 보고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또 프로파일러 5명을 투입해 고씨에 대한 조사를 이어가면서 정확한 범행동기도 찾아낼 방침이다.

경찰의 수사가 지지부진하자 살해된 피해자인 A씨의 지역 주민 60여명은 지난 8일 제주동부경찰서를 항의 방문했다. 이들은 기자회견을 갖고 “경찰의 수사초기 현장보존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유가족이 CCTV를 직접 찾아내는 등 미적미적한 초동수사의 문제점이 많다”며 경찰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

김영균 기자 ykk22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