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의 성범죄, 폭행·협박 말고 위력 따져봐야

입력 2019-06-05 00:15 수정 2019-06-05 00:15
이병주 기자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 수사권고 관련 수사단(단장 여환섭 검사장)이 김학의(63·사법연수원 14기) 전 법무부 차관을 뇌물수수 혐의로 4일 재판에 넘겼다. 다만, 성폭행 혐의는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제외됐다. 성폭행 공범 혐의를 적용하려면 폭행·협박 사실을 알면서도 성관계를 맺어야 하지만 김 전 차관은 이를 몰랐을 수 있다는 것이 검찰 입장이다. 성접대는 맞지만 성폭행은 아니라는 의미다. 피해 여성이 김 전 차관과의 성행위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고, 적어도 김 전 차관은 그렇게 판단했다고 여겼다.

현행법, 폭행·협박있어야만 강간 인정

현행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을 강간죄의 구성요건으로 한다. 성폭력의 보호법익을 성적자기결정권이라고 판시하고 있긴 하지만 수사나 재판 과정에서는 최협의설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 얼마나 심한 폭행·협박이 있었는지에 집중하는 것이다. 강간이 인정되려면 피해자가 폭행·협박을 당해야 하고 여기에 적극적으로 반항했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피해 여성은 김 전 차관과의 성행위 당시 거세게 저항하지 않았다.

이같은 현행법 체제 하에서는 재판부의 성인지감수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위계관계에서는 별도의 폭행이나 협박 없이 성범죄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위력은 피해자를 항거불능의 상태로 만들 수 있고, 저항 또는 저항의사마저 표할 수 없도록 취약성을 교묘히 이용하기도 한다. 이 경우 현행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다. 피해자들은 위력에 의해 형식적인 동의를 표하거나, 거부의사를 뚜렷하게 밝히지 못하게 된다.

수사 과정에서 2차 피해를 입을 가능성도 높다. 조사를 받으면서 얼마나 저항했나, 왜 거부하지 않았나 같은 질문을 받고 대답해야 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피해자에게 질문할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어떻게 동의를 구했는지, 무엇을 근거로 동의 여부를 판단했는지 등을 질문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간죄는 ‘동의’로 판단해야… ‘비동의 간음죄’란?

현재의 강간죄 구성요건을 변경하거나 ‘비동의 간음죄’를 별도로 신설하는 내용을 주요 골자로 하는 8개의 형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돼있다. 강간죄를 수사·판결할 때 폭행·협박 여부가 아닌 동의 여부로 개정하자는 취지다.

외국의 경우 형식적 동의가 있었어도 이 과정에 위력이 존재했다면 성폭행으로 처벌한다. 특히 캐나다와 스웨덴에서는 가해자가 동의 여부를 부주의하게 판단하거나 과실로 잘못 판단한 경우에도 처벌한다.

앞서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는 2018년 제8차 한국정부의 성평등 정책 전반에 대한 심의를 한 후 ‘젠더에 기반한 여성에 대한 폭력’ 분야 7가지 권고 내용 중 첫 번째로 형법 제297조를 개정해 피해자의 자유로운 동의 부족을 중심으로 강간을 정의할 것을 강하게 권고했다.

성접대는 맞지만 성폭행은 아니다

검찰에 따르면 건설업자 윤중천씨는 2007년 11월 13일 서울 역삼동 한 오피스텔에서 성범죄를 저질렀다. 이 자리에는 김 전 차관도 있었다. 검찰은 이들과 피해여성 이모씨의 성관계 사진 4장을 확보했다. 하지만 검찰은 윤씨의 구속영장 청구서에 이 같은 사실을 적시하면서도 김 전 차관은 공범이 아닌 것으로 봤다.

판단의 근거는 이씨 진술이었다. 검찰은 “이씨는 ‘윤씨가 김 전 차관을 잘 모셔야 한다고 강요해 내 처지를 김 전 차관에게 알리지 못했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동시에 이씨가 검찰에 “김 전 차관은 모를 수가 없다. 윤씨가 욕설을 하는 것을 직접 다 들었다”는 취지의 진술도 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이 상황을 몰랐다는 김 전 차관의 진술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검찰은 “김 전 차관의 강간 및 특수강간 혐의 공범 여부를 수사해왔지만 폭행·협박을 동반한 성폭행 혐의와 고의성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