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걔가 예쁘지 않아? 얘랑, 얘랑 얘로 서빙하자” “예쁘기만 하네~ 우리 과 주점 흥행 예감!”
지난해 방송된 웹툰 원작 드라마 ‘내 아이디는 강남미인’(JTBC) 5, 6회의 장면이다. 대학 신입생인 미래와 수아는 축제 주점에서 서빙을 하게 됐다. 선배들이 골라온 유니폼은 짧고, 붙고, 파였다. 남자 선배들은 당황하는 미래를 감탄하듯 바라보며 “우리 과 주점 흥행 예감”이라고 말했다. 방송이 끝난 후 “하이퍼리얼리즘(굉장히 현실적)”이라는 평이 쏟아졌다.
실제로 그간 대학축제의 주점에 대해서는 성 상품화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대학축제인지 유흥업소인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2015년 K대학교 한 학과에서는 여학생들이 짧은 치마와 몸에 붙는 메이드 복장으로 호객행위를 했다. 이 모습을 버젓이 홍보 포스터에 게재하기도 했다. Y대학교 14학번 A씨는 “신입생일 때 손님 테이블에 여자 손님들과 합석이 안되면 서빙하던 1학년 여학생이 함께 앉아 술을 마셔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뿐만 아니다. ‘넣어줘, 빨아줄게’ ‘섹파’ ‘수줍게 벌린’ ‘앞치기 뒤치기’ 등 성인 광고물을 떠올리게 하는 낯뜨거운 문구는 대학축제 주점에서 효과적인 홍보 수단으로 쓰였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대학축제 문화는 비난의 화살을 맞기에 충분했다. 그에 비해 학생들의 문제의식은 턱없이 부족했다. 건국대학교 몸 문화연구소 윤김지영 교수는 “이 같은 행위는 여성이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채워주는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더 이상의 성적 대상화는 ‘NO’
2019년 대학축제는 ‘지각변동’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닐 만큼 달라졌다. 국민일보 기자들이 16개 대학교 축제를 취재한 결과 선정적인 호객행위와 홍보 등 문제가 될 만한 요소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국민대학교에 재학 중인 김유경(15학번)씨는 최근 여러 대학축제를 다니며 변화를 체감했다고 전했다. 김씨는 “과거와 비교해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한 부분은 많이 사라진 것 같다”고 말했다.
변화의 배경에는 두 가지 요소가 맞물려 있다. 우선 정부가 지난해부터 대학축제 주점에서 술 판매를 금지하면서 ‘호객행위’를 할 필요가 없게 됐다. 동국대학교에 재학 중인 B씨(15학번)는 “술 마시고 싶은 사람들은 따로 준비해 마시는 분위기”라고 밝혔다.
젠더이슈에 대한 관심도 축제 풍경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우연수(16학번)씨는 “페미니즘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축제 기간에 선정적인 노출, 자극적인 문구로 호객행위를 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학생들이 많아졌다”고 전했다.
축제에 녹아든 페미니즘
페미니즘에 대한 높아진 관심은 다양한 형태로 반영되고 있었다. 서울여자대학교 축제는 올해 ‘여세를 몰아’라는 타이틀로 진행됐다. 여성 서사의 영화를 상영하고 페미니즘을 주제로 토크쇼도 마련했다.
‘여성이 중심이 되는 세상에 빠져드세’는 여성 주연·여성 서사의 영화들을 상영하는 야외 영화제다. 학생투표를 통해 ‘허스토리’ ‘미쓰백’ 등이 상영작 목록에 올랐다. ‘여기서 우리 함께 공감하세’는 교수·학생들이 함께하는 페미니즘 미니토크쇼였다. 토크쇼는 흥행에도 성공했다. 5~10명이 앉을 수 있는 긴 의자 10여개가 꽉 찼고 서서 듣는 학생들도 많았다. 교수들은 “여자대학교에서 여성으로서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마음껏 만끽하라”는 등 다양한 조언을 건넸다.
토크쇼를 진행한 김홍미리 교수는 “학생들이 페미니즘에 대해 고파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기대가 컸다”며 “강의실과 같이 딱딱한 곳 말고 야외공간에서 학생들이 관심 있는 주제를 가지고 편안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서윤정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여세’라는 단어에 학교의 정체성과 학우들의 관심사를 반영해 ‘여자의 세상’이라는 의미도 부여하려고 했지만 ‘계집 녀(女)’자를 쓰는 게 마음에 걸렸다”며 “다른 한자를 찾아 ‘더불 여(與)’, ‘세상 세(世)’를 썼지만 의미를 국한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학우들이 각자 생각하는 ‘여세’이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서울여대 캠퍼스 안에 자리 잡은 디지털 성범죄 캠페인 부스도 눈에 띄었다. 관계자들은 큰 목소리로 캠페인을 진행했다. 부스 앞은 참여 학생들로 북적댔다.
처음 축제에 온 이석린(19학번)씨는 “여대로서의 정체성, 학우들의 관심사가 드러나는 축제로 가는 방향이 좋다”고 말했다. 정윤경(17학번)씨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여성 혐오 가사 등으로 논란이 됐던 가수들이 축제시즌에 왔었는데 올해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고 했다.
주점 대신 자라온 여성연대 문화
이화여자대학교는 주점을 진행하지 않는 대표적인 학교다. 1996년까지 10년 동안 자행됐던 고려대학교 남학생의 축제 난입 및 폭력사태 때문이다. 당시 이화여대 총학생회는 이를 ‘성폭력’이라고 규정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이화여대 축제에서 주점은 사라졌다.
때문에 이화여대는 낮 축제 문화가 발달했다. 부스에서는 먹거리나 굿즈 등을 판매하고, 미니 게임이나 캠페인이 진행된다. 학교를 상징하는 그림과 기호로 스티커, 텀블러 등 다양한 아이템을 만드는 ‘굿즈 문화’는 이화여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자신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이른바 ‘미닝아웃’ 굿즈가 대세다.
신입생 때부터 굿즈를 제작해 판매한 양하은(14학번)씨는 “제가 1~2학년 때부터 페미니즘과 퀴어 문화가 발달하면서 굿즈 시장이 더 커진 것 같다”면서 “확실히 두 굿즈의 판매량이 훨씬 많다.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할 수 있는 상품이 많이 팔린다”고 설명했다. 박정은(16학번)씨는 “페미니즘 문구가 새겨진 스티커를 사고 싶었는데 볼 때마다 줄이 길었다”고 아쉬워하면서도 “굿즈문화는 미닝아웃 차원에서도 서로 연대하는 느낌이 들어 좋다”고 밝혔다.
이번 축제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는 가수 공연이었다. 메인 초대 가수 세 명은 모두 여성이었다. 그 중 핫펠트와 안예은은 여성인권에 대한 관심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낸 가수다. 20대 여성들의 어린 시절을 함께한 애니메이션 ‘달빛천사’의 성우 이용신씨가 무대에 선 것도 큰 호응을 얻었다.
이번 섭외는 학생들의 요구를 제대로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총학생회는 섭외를 위해 설문조사를 실시, 큰 논란이 없는 가수 명단을 정리해 내부 논의를 진행했다. 133주년 대동제의 기조(대동, 도약, 연대)에 부합하는지 여부와 재정적인 부분을 고려했다고 총학생회 관계자는 밝혔다.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돋보였다. 총학생회 관계자는 “소수자가 배제되거나 차별되지 않는 대동제가 기조 중 하나였다”며 “가수 공연 진행 전 차별적 발언을 유의해달라는 안내문을 발송했고, 식이지향과 관련해 모두가 즐길 수 있도록 개막식에 비건 비빔밥을 준비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장서윤(16학번)씨는 “단순히 유명 연예인을 보고 즐기는 것을 넘어 축제에 다양한 의미를 담는 모습이 좋다”고 평가했다.
윤김 교수는 “이전보다 확연히 높아진 성 평등 의식이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널리 확산되고 수용된 결과 축제에도 이러한 현상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며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 있는 대학에서 모두가 평등한 입장에서 함께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강태현 백승연 신유미 인턴기자